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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불 Oct 30. 2023

중국 드라마에 접속되셨습니다

중년 여사 J의 중국 드라마 입문기

“우리도 시대에 발맞춰 볼까?”

“무슨 소리야?”

한창 바쁜 오전시간에 참 뜬금없는 소리였다.

“넷플릭스 말이야”

“넷플릭스가 왜?” 우리 집은 티비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내 일 때문에 거실에 놓지 못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티비를 보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다. 안방 벽에 걸려있는 티비는 가끔씩 함께 영화를 보는 일 아니면 거의 틀 일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넷플릭스라니.     


코로나가 막 시작할 무렵인 20년 겨울,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내 일도 잠시 휴업이었다. 그러니 온종일 초딩이 두 명과 지지고 볶고를 반복하는 아주 아주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엄마들의 루틴은 비슷했다.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의 줌 수업을 봐줘야 하고, 수업 후 과제를 챙긴다. 돌아서면 밥을 차리고 간식을 대령했다. 잠시 아이들과 함께 놀다 공부를 봐주면 또다시 밥 차리는 시간. 이놈의 밥. 밥. 밥. 눈이 돌아갈 듯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넷플릭스가 웬 말이냐고.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듯한 남의 편 때문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얼렁뚱땅 넷플릭스 구독을 시작했고 애들이랑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것에 지친 나는 쉬는 타이밍에 아이들에게 영어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기로 마음속 합의에 이르렀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미디어와 멀어진 탓이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였다. 아주 신중하게 고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물어봐야겠다.     



“삼생삼세 십리도화 봐봐”

“그게 뭐야?”

“중국 드라마인데 재미있어.”

친구들의 반응이 웃겼다. 추천인에게 애들이랑 집에만 있다 보니 힘들어서 이상해졌다는 둥,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둥, 누가 그런 걸 보냐는 둥 평소 보기 힘든 공격적인 반응을 쏟아냈고 마음 고운 내 친구는 대노하며 앞으로 너네와 말도 안 섞을 것이라는 멘트와 함께 퇴장하였다. 기대했던 수확을 하지 못한 나는 평소에 별로 성능이랄 게 없어 사용하지 못하는 나의 촉을 발동시켰다.     

꿈나라 열차의 출발과 함께 맥주 한 캔을 들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신중하게 드라마를 검색하는 척했지만 그다지 보는 눈 없는 내 눈이 재미있는 걸 골라내기란. 소중한 이 밤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나의 굳은 결심은 오늘 밤 뭔가 하나를 건지겠다는 다짐으로 변했다. 일단 검색이나 해보자. 혹시 알아. 소중한 ‘나만의’ 시간을 환상적으로 채워줄지. 나의 안목을 지켜보고 있는 남편에게 한 수 알려줄 수 있기를 바라며 리모컨 신공을 발휘했다. 피곤에 절어 나도 모르게 잠들기 전에 완벽한 초이스를 해야 하지만, 검색만 하다 이 밤이 다 지날 판이었다. 내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 피 같은 시간. 내일 아침 다시 시작되는 일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이 시간을 소중히 다뤄줘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재미있다니 삼생 뭐시기나 보자.    

 

 삼생삼세 십리도화 29화 中 (넷플릭스 캡처)


58화. 무려 58화. 웃음이 나온다. 성격 급한 사람은 드라마를 채 보지도 못하고 다 죽겠다 싶다. 작가가 마음 가는 대로 썼는지 서사나 개연성도 개나 줘버린 듯. 일단 버텨보자. 도저히 안되면 욕을 한 바가지 하더라도 함 봐보자. 이대로 본전도 못 뽑고 물러날 순 없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매직. 뭐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매직’. 남주와 여주의 피 토하는 러브라인이 나오고 격정의 순간들이 나의 정신을 갑작스럽게 지배했다. 없던 아드레날린이 완벽히 충전된 느낌. 마흔의 중년 여자가 중드에 입문되었다. 이쯤 되니 아이들의 밥 달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우뢰매에서 본 것 같은 충격적인 CG와 저렴한 세트장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든 나의 첫 번째 중드는 낮과 밤을 바쳐 5일 동안 지속되었고,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토끼 같지 않은 눈은 5일 내내 토끼와 친구였고, 하루 한 잔이 원칙이던 라떼는 4잔 5잔으로 늘어났다. 피곤하지도 않았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플러그를 꽂은 느낌. 내일과 집안일, 아이들과 남편을 챙기며 나를 돌아볼 여유는 조금도 없이 숨차게 살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이제 나는 ‘지는 해’라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광명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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