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도서관에서 친구와 마주쳐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요즘 바쁜 일정으로 눈 밑 떨림이 좀 있었는데, 마음이 따뜻한 이 친구, 수다 삼매경인 그 순간에도 내 눈 떨림을 놓치지 않고 보았나 보다.
“로켓배송 1박스 도착 예정”
물건을 사지 않았는데 도착 예정 문자를 받고 확인해 보니 친구가 보낸 영양제였다. 따땃한 마음에 그간 피로가 싹 녹았다. 머릿속으로 그 친구가 필요했던 게 뭐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일을 하다가 도착 완료 문자를 보고 집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일을 마치고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물품이 도착 문자가 왔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고, 아무래도 주소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니 역시나였다. 312동을 착각해 311동으로 보낸 것이다.
내 영양제를 챙기는 그녀의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에 대한 나의 고마운 마음은 원수는 꼭 갚겠다는 살벌한 말로 쑥스러움을 감추며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보통 나는, 택배가 우리 집으로 오배송되면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잘못 배송된 물품은 현관 앞에 둔다. 그럼, 언제라도 주인이 와서 편하게 챙겨갈 수 있으니까. 아파트 카페에 올라온 글이 있는지 확인했다. 글이 없다. 311동으로 갔다. 늦은 밤이라 다른 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경비아저씨를 호출하는 것이 죄송해 그 동에 들어가는 사람과 섞여서 들어갈 마음으로 동 앞에 서성거리다 사람들과 합류해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흘긋흘긋 나를 쳐다봤다. 왜 안 그러겠는가. 출입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서성이다 사람이 들어가니 쫓아 들어온 나는 내가 봐도 의심스러운 사람인 걸. 이러저러한 나의 이유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이 길지 않다.
1202호에 내렸다. 현관문 앞을 확인하니 아무것도 없다. 낮에 안 찾아가니 1202호 주인분이 물건이 걱정돼 집안으로 들고 들어가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낮에 다시 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충일 연휴라 너무 이른 아침은 안되니, 11시 반쯤 1202호로 다시 찾아갔다. 출입문 앞에서 호출을 누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312동 1202호인데 어제 오배송된 택배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1202호에 사시는 분이 “어제 안 뜯은 택배가 있는데 그건가?”라고 말씀하시며 물품이 뭐냐고 물었다. 물품을 묻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영양제라고 답했다. 일단 문은 열어준다고 하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02호에서 내렸다. 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엄마와 4~5살로 보이는 딸아이가 함께 나왔다. 상자를 뜯어서 열어진 택배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맞냐고 물었다. 뜯어진 택배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집으로 온 택배는 확인하지 않고 뜯어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랑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1202호에 사는 그분은 물건을 주는 거로 끝내지 않고 나에게 한 마디 일침을 놓으셨다.
이곳에 이사 와서 7년 동안 한 번도 주소를 실수한 적이 없다. 나는 그녀를 처음 봤다. 실수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니. ‘네네’가 자동으로 입에서 나왔다. 대답하는 차에 그녀는 뒤돌아섰다. 집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뒤돌아섰는데 그녀가 한 번 더 나를 쳤다.
뒤로 돌았다. 고맙다는 말을 안 할 리가 없는데, 내가 인사를 안 했나? 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내가 실수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구나. 그리고 뒤돌아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감사를 전할 수 있는 타이밍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감사를 전할 타이밍이 없었을까. 평소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를 전하는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습관처럼 하는 감사의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거짓으로라도 감사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다. 택배 물품의 주소를 실수하는 일은 흔하다. 대수롭지 않은, 실수라고 말하기도 뭐 한, 그냥 그런 거다. 간단하게 아파트 카페에 사진 찍어 올려놔 주기만 하면 알아서 찾아간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단순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나한테 한 마디 훈계도 했으니 됐지 않은가. 내가 감사의 말까지 전해야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발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분실 카드를 습득해 280여만 원을 쓴 일이 있었다. 카드 주인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사용한 금액만 입금하면 다른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기가 막힌다. 아이의 할머니는 ‘당신이 카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손녀 버릇이 나빠졌다.’라고 전하며 고소하라는 적반하장식의 답변을 했다. 무슨 일인가. 이렇게 문제를 삼는다면 카드를 분실한 사람은 태어난 것부터 죄가 되는 세상이다.
어떤 일일지라도 나에게 피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너그러울 수 없다. 내 손해나 감정에 대해 어루만져 줘야 하고 그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합리적인 기준이나 상황은 고려되지 않는다. 내 기준에 따라 합당하지 못하니 난 그에 관해 언짢아진 나의 감정이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상대는 그걸 들어줘야 한다. 도덕, 윤리, 규범은 너무 멀다. 내 감정과 가치판단이 우선이고 굳이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감정을 숨기고 참으면 왠지 나만 억울하고 바보가 되는 것 같은 시대이다. 우리는 상황이나 입장, 인정, 배려보다는 나의 감정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일이건, 상한 나의 감정을 어루만져 줘야 하고 내가 손해라거나 불리하거나 밑지는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진다.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어떤 손해도 용납하지 못하니 차라리 골치 아픈 관계는 끊어내고 혼자만의 평화로운 삶으로 들어간다.
집에 돌아와 괜히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 다른 그녀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녀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아이와 정신없이 일과를 보내던 중에 잘못 배달된 택배를 찾으러 온 사람이 귀찮을 수 있다. 분명 그 사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골치 아픈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