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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불 Nov 29. 2023

인정하는 여자

큰아이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이다.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들과 좀 다르다. 터닝메카드 광풍이었던 지난 2015년쯤, 아이를 위해 핫한 터닝메카드를 구매하고자 품을 파는 것은 좋은 부모로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가장 핫하고 좋아하는 터닝메카드를 사다 주었다. 체능단을 다녀온 후 신나서 장난감을 주머니에 넣고 놀이터를 나갔던 아이는 집에 돌아와 터닝메카드를 친구에게 주었다고 했다. 어렵게 구한 장난감을 왜 친구에게 줬는지 화가 나서 아이에게 따져 물었다. 왜 그랬냐고, 엄마가 널 위해 힘들게 구해준 걸 모르냐고. “친구가 갖고 싶어 했어” 아이의 대답이었다.    

 


7살, 10살 때는 같은 일이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난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에 ADHD를 앓고 있는 친구와 큰아이를 일 년 동안 짝을하면 안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짝을 지어놓으면 계속 싸워 수업 진행이 어려우니 부탁한다고 하셨다. 그런 아이였다. 매년 임원을 하며 매일 제일 늦게까지 남아 치우지 않고 집에 가는 아이들을 대신해 청소를 했고, 싸우는 친구들을 말리느라 머리가 한 움큼 뜯겨오는 날도 있었다. 공개수업이나 상담을 가면 선생님들의 단골 멘트는 ‘큰아이를 어떻게 키우셨어요? 제 아이도 큰아이처럼 키우고 싶어요’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주변 엄마들에게 ‘나 좀 보세요, 나 이런 애 키우는 엄마예요’ 하며 어깨가 하늘로 솟을 만큼 뿌듯함과 잠깐의 만족스러움의 대가는 항상 감당하기 힘들었다. 큰아이를 만만하게 보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밥’이었고, 약삭빠른 아이들의 손쉬운 ‘이용 대상’이었다. 마음대로 말해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다 받아주는 아이였으니 보는 내 속만 까매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큰아이 설렘의 크기보다 나의 걱정 크기가 더 컸다. 한창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에게 얼마나 상처받을지 혹여나 어려운 일이 생기진 않을지. 사실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그 일을 내가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지가 더 고민되기는 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그런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열 정하기 놀이를 시작한 중1 남자아이들은 만만해 보이는 아이를 골랐고, 여지없이 걸려들었다. 학기 초에 아이는 복도에서 뺨을 맞기도 했고, 일진 아이들의 화풀이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웬만해서는 아이들 일에 대응하지 않으려고 하는 원칙이 있다. 나의 큰아이는 순하고 착한 아이지만, 아들의 친구들도 아들과 동갑의 아이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큰아이도 억울하고 화나도 대응하지 않으니 쉬운 사람이었을까. 또, 사달이 났다. 집에 돌아와 교복을 벗은 아이의 목에 실핏줄이 여기저기 터져있었고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랬냐고 물으니,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며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화내며 추궁하니 같은 반 장난꾸러기라고 했다. 평소에 큰아이에게 손을 자주 대는 아이였고 시비 걸기를 좋아했다. 아무 이유 없이 목에 초크를 걸었다고 했다. 큰아이보다 키도 작은 아이였다. 이번엔 그냥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선생님께 상처를 찍은 사진을 보내고 상대 엄마의 연락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온몸이 떨려왔다. 무서웠다. 아이가 많이 다쳤지만, 그것보다 작은 동네에서 껄끄러운 사이로 상대 엄마를 마주칠까, 헛소문이 돌지 않을까,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면 어쩌지. 우려와 다르게 사진을 본 엄마는 곧바로 전화해 사과했다. 떨리던 마음이 안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 아이가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사과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왜 사과를 받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잘못에 진심을 구하기 어려운 것일까? 요즘 세상은 나의 잘못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네가 나에게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말로 후려치던 행동을 하던 그건 네가 그랬기 때문이라는 ‘남 탓’이 들어있다. 나는 무결하고 ‘타인은 지옥이다.’



절대로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고 싶어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나 역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상처를 줬을 수 있다. 그때마다 네가 나에게 준 상처를 되갚아 주고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죽을죄라도 진양 석고대죄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준 상처는 울산바위마냥 큰데 남에게 준 상처는 눈곱만 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 탓의 이유는 피해의식이다. 피해의식의 기준은 그때의 내 맘이다. 윤리적이거나 규범적 기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른 이유를 만들어 낸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모든 행동이나 말은 상처이고 수동적인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만드는 자위이다.     



요즘 <나는 solo>가 화젯거리이다. 특히 16기 영*이란 여자 출연자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다. 화면에 비친 이분은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 맥락에 따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한 특정 단어에 의해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화를 내며 상대를 탓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치 진실인 양 이야기하며 상대를 뒤흔들어 놓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상대가 사과를 요구하면 타인을 탓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나는 무결하고 내 모든 행동은 타인으로부터 기인한다.


     

피해의식으로 인해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나의 행동을 포장해서도 안 되고 이유를 붙여서도 안 된다. 나의 죄책감에 이유를 붙여 다른 것으로 둔갑시켜 버리면 나는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자격을 잃게 된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이유 없이 당한 폭력이었지만, 그 부분을 인정하고 사과해 준 아이 친구 엄마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사진: UnsplashCallum Sk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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