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넉넉한 시간
중드를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굉장히 거슬리는 부분이 생겼다. 입의 모양과 발음이 안 맞는다는 걸 눈치챌 무렵이었던 거 같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걸맞지 않은 중후한 목소리. 몰입을 방해하는 잘생긴 오빠의 목소리를 원망하며 이유를 찾아보았다.
더빙은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이 이름으로 불렸을 때나 더빙이 있었지, 내가 자라며 드라마를 보던 시절 후시녹음은 생각도 안 해봤다. 목소리와 얼굴이 어울리지 않았고, 더 웃기는 건 대사를 수정하는 탓인지 소리와 입 모양이 다를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중드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디테일에 목숨 거는 대한민국 여자 사람인데 왜 중국 드라마에는 그렇게나관대할까.
40대 중반의 나는 부모님께 용돈 받으며 깜찍 발랄하게 옷을 코디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 밖을 나서는 여유가 인생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발로는 설거지를 하고 손으로는 집을 정리할 만큼 집안일에 익숙하고, 바쁘게 오가는 아이들을 건사하며, 사표를 품고 사는 남편을 돌아보고 정신없이 내일을 한다. 그렇게 바쁘게 24시간을 쪼개어 산다. 일단 눈뜨기 시작하면 다시 눕기 전까지 종종걸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부족하다. 개운하게 내일을 다 끝내고 누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의 할 일 중 많은 부분을 내일의 나에게 미뤄둔 채 찝찝한 느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쌓인 하루하루로 인해 무엇하나 준비되거나 정리된 느낌 없이 눈 깜짝할 새 중년을 맞이해 버렸다. 아이들의 엄마, 중년 남편의 아내, 양가 부모님의 자식,형제들 사이 맏이, 논술 선생님, 동네 엄마들 고민을 들어주는 언니. 당장 내 앞가림도 힘든데 여기저기 불러주는 데가 많아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시간은 빠듯하고, 해결하지 못한 일들은 산더미다. 미뤄둔 일들이 생각나는 아침이면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 백 프로라도 저절로 몸이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나 쏜살같이 방문을 나선다. 이렇게 지내온 지난 십 년.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으름과 늦잠의 대명사였던 내가 5~6시간만 자면 절로 눈이 떠졌고, 끼니를 챙기지 못해 식도염이 생겼다. 수술한 허리는 늘어나는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몇 개 남아있지 않던 디스크가 터져버렸고, 매일 책을 읽고 워크지 작업을 해야 해 숙명처럼 숙여진 목은 허리와 같이 디스크가 터져버렸다. 그 와중에 어깨 회전근까지 말썽이다. 휴.
매일 마무리 지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눕기 싫지만, 또 내일의 하루를 헤쳐 나가기 위해 침대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다. 바로 그때 나는 침대에 누워 중드를 튼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보낸 내 하루의 보상,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룬 채 잠자리에 드는 죄책감에 대한 망각 그리고 잠깐의 유희. 하지만, 이 보상 시스템은 채 15분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오늘은 반드시 이 드라마의 끝을 보리라 비장하게 결심해도 결국은 15분이다. 마흔이 넘어 머리가 베개에 닿기만 하면 잠드는 시절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보낸 하루 덕분에 거의 ‘레드 썬’ 수준으로 잠들어 버린다. 아침이면 그렇게 허무하게 져버린 나의 밤에 대한 원망을 나 자신에게 퍼붓지만, 자정의 나는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이 15분이 의미가 없지 않다. 고작 15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중드는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볼만큼 매 회차가 박진감 넘치거나 꽉 차 있지 않다.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봐도 충분하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쓴 이 시간은 내일의 나를 움직이게 할 만큼 나 스스로 흡족하고 만족스럽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혹은 이 문제를 해결하면. 그때는 쉴 시간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여유가 찾아오는 줄 알았다. 이제야 알았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건 인생의 막바지라는 걸. 그런 고요를 맞이하는 순간보다 힘들지만 힘듦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 밤도 입 모양과 더빙된 소리가 맞지 않는 중드를 보며 15분을 넘기기 힘들겠지만, 이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하다.
사진 | 티빙 직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