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제맛이지
"사줘"
아주 입에 착 붙어있는 말이다.
"돈 맡겨 놨냐?"
즉각적인 응수.
아무 약속도 계획도 없는 주말 오후는 어디? 쇼핑몰이다. 느지막한 오후 개중 멀쩡해 보이는 옷을 골라 입고 근처 쇼핑몰로 향한다. 목적지 도착 몇 분을 남겨두고 스멀스멀 자라고 있는 '그 싹'을 자르기 위해 먼저 입을 연다. "아무것도 안 사줘" 그녀를 향한 내 도발에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다.
나는 자식이 둘이다. 둘은 남매이다. 전 글에서 언급한 적 있는데 1호와 2호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졌다. 법 없이도 살, 도덕적이다 못해 착해 빠진 남자 1호와 그의 장난기 및 남성미를 다 가져간 그녀, 2호.
1호의 여러 가지 특징 중 하나는 물욕이 없는 것이다. 옷, 신발, 가방, 게임 아이템 그 어느 하나도 중1 남자아이의 그것과 같지 않다. 사준다 해도 흥미가 없다. 하지만 그녀. 그녀는 다르다. 지나가는 또래, 혹은 매장의 반짝이는 아이템은 모두 그녀 마음에 날아든다. 1호의 물욕까지 다 가져가 버린 그녀, 2호.
나 역시 1호와 비슷하게 물욕이 없는 편이다. 티셔츠 몇 장, 바지 몇 벌로 보통 일 년을 보낸다. 신발이 특이하면 옷을 맞춰 입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다. 신발도 계절별 한 켤레. 화장품도 한 종류. 부엌살림이 많으면 수납이 어려워 딱 필요한 개수만큼의 접시와 냄비들 그 이상은 들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품이나 장식 따위는 없다. 집이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낙엽마냥 바스락 소리가 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정도가 딱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정도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난 2호의 물건을 향한 사랑을 인정할 수 없다.
"엄마, 다른 애들은 신발에 털 있는 슬리퍼 신고 다녀"
"응, 그렇구나"
"사줘"
"운동화 있으니까 그거 신어. 겨울에 무슨 슬리퍼야!"
그녀의 외침을 가볍게 일갈한 나는 쇼핑몰 안을 구경하며 이리저리 돌아보다 따뜻한 털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2호 말대로 유행인 듯했다. 털이 보송보송하게 신발 안을 채우고 있는 그 슬리퍼는 보는 것만으로도 발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겨울마다 수족냉증을 앓고 있는 나는 따뜻해 보이는 저 슬리퍼가 좀 끌렸다.
"털 슬리퍼 진짜 갖고 싶어? 왜?"
"슬리퍼 진짜 유행이야, 애들 다 신고 다녀. 저거 신으면 이뻐 보인다고. 그리고 나만 없어!"
'나만 없어'가 가슴에 콕 박혔다. 평소 2호의 물욕에 대한 철학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사겠다고 하면 들어보지도 않고 차단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양육 태도 이기도 하고, 아직은 작은 걸 갖고 싶어 하지만 앞으로 크면서 사달라고 하는 것들의 양이나 크기를 감당할 수 없다. 또, 뭐든 사고 싶어 하는 그녀가 고르는 것들이 내 눈엔 언젠가 쓰레기통으로 향할 '쓰레기'로 보인다는 것. 하나뿐인 지구환경을 위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그런데 '나만 없어'가 나를 머쓱하게 했다.
아이에 관해 관대하고 허용적인 요즘 부모의 패러다임과 다른 내 모습에 갑자기 죄책감이 일었다.
"가보자, 신발 매장"
"진짜? 대박. 정말? 엄마 진짜야?"
아이는 확인의 확인을 거듭하고 재빠르게 신발매장으로 향했다. 혹시나 중간에 엄마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눈치를 보며 다람쥐마냥 빠른 걸음으로 신나게 앞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2호 말대로 유행인 듯했다. 매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털 슬리퍼가 진열되어 있었다. 너무 신난 2호는 나에게 이런저런 장단점을 나열하며 털 슬리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산을 넘지 않는 범위의 적당한 신발을 골라 2호의 품에 안겨주었다.
2호의 흥분은 거셌다. 평소 1호의 요구에만 반응하던 엄마가 2호의 소원을 수리했고, 드디어 유행하는 아이템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신발을 신지도 않고 그대로 포장해서 구경하는 내내 들고 다녔다. 평소 같았으면 매장의 물건들을 동그란 눈으로 지켜보고 '사줘'를 남발하고 있었을 텐데, 쇼핑백을 보물인 양 건드리지도 못하고 높이 들어 계속 쳐다본다.
"그렇게 좋아?"
"응, 완전 짱 좋아. 니돈내산"
"뭐라고? 내돈내산?"
"아니, 니돈내산이라고."
유행어를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돈내산'은 어디서 알아 왔나 싶었다. 그런데 내돈내산도 아니고 '니돈내산'이란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엄마 돈으로 내 물건 사서 짱 좋다고. 이게 진짜지"
순간 나는 일시 정지 후 '빵'하고 터져버렸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물건을 사서 나를 꾸미는 즐거움과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더불어, 자기의 용돈은 저 속에 꿍쳐두고 엄마 돈으로 사는 즐거움을 계산한다. 이제는 나의 철학과 그녀의 철학이 타협할 시기가 된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의 고집을 그녀에게 강요할 순 없다. 그녀의 자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다른 모습의 엄마가 필요하겠지. 힘들겠지만, 그럴 시간이다.
이제 입은 다물고 돈이나 열심히 벌어야겠다.
"엄마, 나 크리스마스 선물 생각해 놨는데. 요즘 폴라로이드가......"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