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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작책쓰기 Dec 20. 2024

지시와 부탁은 다릅니다

쉬는 시간입니다. 교실 아이들은 뛰어다닙니다. 쉬는 시간엔 아이들을 지켜봅니다.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전화가 울리네요. 내선이지만 처음 받아보는 번호입니다. 교통 교육을 담당하는 전담교사였습니다.

"교통담당인데요, 내년 가방 덮개  1학년이 챙겨서 내년 1학년 담임한테 주면 좋겠는데."

여기까진 제가 해야지요.

"택배 보관함에 있습니다. 가져가서 수량 세어서 제게 알려주세요. 1학년, 4학년 구분해야 될 겁니다. 제가 수량 공문 보고를 해야 됩니다."

주변은 시끄럽습니다. 교통 교육 담당 선생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검수도 제가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네요. 이미 쌓인 쿨 메시지가 많습니다. 다면 평가 파일, 업무 평가서, 예산안 제출물, 성적 관련, 보건실 제출물 등.


점심 급식실 가는 길, 택배함을 확인했습니다. 박스가 크네요. 두 개 학년용 가방 덮개라고 예상되었습니다. 들어보았습니다. 들어지지 않네요. 1층에서 지하 급식실 및 택배함 가는 길엔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즉, 수레가 갈 수 없는 곳, 일일이 들어서 짐을 옮겨야 합니다.

뭔가 애매하지만 웬만하면 돕기로 했는데요, 들어지지도 않는 택배 박스에 머리에 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식사 후 교실에 와서 교무실에 전화했습니다.

"교감선생님! 교통 교육 담당 선생님이 제게 가방 덮개 검수를 해서 수량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내년 1학년과 4학년한테 전달도 하라는데요, 가방 덮개는 지하 1층에 있습니다. 제가 지시를 받는 게 맞습니까? 맞다고 하면 제가 할 텐데, 택배가 무겁습니다."

교감선생님은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연구실에 와서 동 학년에게 상황을 말했죠.

"웬만하면 부장님이 하실 텐데, 택배를 옮겨서 개수까지 센다고요? 택배 박스를 우리 연구실에 갖다주고 부탁했으면 했을 텐데."

"혹시 교감쌤이 검수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닌데."

이후에 쓰레기 버리러 지하 1층에 갔더니, 누가 검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택배함에 박스가 열려 있고 택배함 선반에 가방 덮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습니다.

오후 내내 그냥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닌 건 아니라고도 말해야 한다는 두 개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육아시간을 훨씬 넘겨 일 처리를 하고 퇴근하면서도 찝찝합니다. 그래도 두 개의 마음 중에 하나를 정하고 퇴근했습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제가 집중할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앞으로 제가 맡을 일에도 내가 할 일과 상대방에게 협조를 구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야겠습니다. 협조 요청 시에는 어떻게 부탁을 할지 미리 멘트라도 준비해 봐야겠습니다. 지시와 부탁은 다르니까요.


https://blog.naver.com/giantbaekjak/223697849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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