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여름을 맞아
서늘하고 진득한 바닷바람과 해무에 둘러싸인 채
파도가 그려낸 선을 따라 걷던 오후 5시.
모래사장에는 지구를 닮은 행성이 박혀 있었다.
반쯤은 게구멍을 틀어막은 채로
나머지 반은 코 앞에 닥쳐오는 파도를 맞이한 채로
생사불명
신원불명
원인불명
모든 것이 불명예인 이 행성에서
게 한 마리가 기어나왔다
모래사장의 색을 뽑아낸 듯한 몸통을 가지고
모래로 만든 제 몸집만한 공을 굴리고
도르륵, 도르륵
쉼 없이 미확인 행성의 한 켠에
자기만의 집을 짓고
몸을 숨기는 게
마치 행성이 자신의 집이었던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게
온 대기가 바닷물에 잠식되며
공기질은 소금기가 주를 이루고
표면은 얼음판처럼 미끄러워 파고들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누구도 처음 만나는 행성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자리를 잡고
숨을 틔우는 생명을 보며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던 인간을 생각했다
어쩌면 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처음을 빚질 수 밖에 없다고
갚아나가지 않는 무례를 범하는 이상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