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포 페인팅이 힐링이요? 스트레스인데요;

애니 배경 칠하기에 관하여.

by 진로

한참 유행하고 지금도 흥하는 게 있다. 피포 페인팅이다. 그러니까 어렸을 적 스케치북 첫 장에 있던 선으로만 된 그림 칠하기 같은 거 말이다. 혹은 마법 소녀들이 열심히 이쁜척하고 있는 그런 그림이나,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괴물이거나 디지털 세상에서 사는 괴물들의 그림들도 있겠다. 대체적으로 그 시절 유행했던 만화들이 대상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대상이 성인이 아닌 아동이기에 그랬던 거 같다. 그 위로 열심히 색칠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뒷장에 그림을 그리던 아이였지 색칠공부를 열심히 하던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스티커만 홀라당 빼서 여기저기 붙였었다.


그렇다면 피포 페인팅은 뭘까? 놀랍게도 피포 페인팅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아이디어 상품인데

유화를 간단하게 즐길 수 없을까 하는 물음 속에서 탄생한 거다. 캔버스, 물감, 붓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막막하지만 그림에 취미를 붙여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의 고민 속에서 나왔다.


그림을 배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제대로 순서를 밟으며 그림을 배운다고 치면 일단 하얀 도화지에 4B연필을 쥐고 선을 긋는 거부터 시작한다. 아니 연필을 쥐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느 세월에 유화를 한단 말인가. 코스를 밟으며 차근차근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우리는 낡고 지치고 시간도 없다. 이미 침대에서 털고 일어나 학원을 가는 거부터가 위대한 걸음의 시작인데 말이다. 그 위대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하는 낡고 지친 이들을 위해 나온 거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도 스케치를 하거나, 물감을 섞어서 색을 만들어야 하거나, 여러 기법을 몰라도 이미 되어있는 판에 색칠만 하면 그럴듯한 명화가 나온다. 집중력을 높아지고 컬러 테라피로 안정감을 얻고 완성하면 그럴듯한 그림까지 나오고 바쁜 일상에 지쳤지만 이러한 취미로 힐링을 하는 나. 멋진 으른 같지 않은가? 근데 그래서 어떠하다고?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그림 위로 색칠을 하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은 가라앉고 무언가 완성이 되니 사람들이 그 부분에서 '힐링'을 하는 거 같다. 특히나 이 시국에 집안에 갇혀 시간을 죽이기 위해 다들 집안에 피포 페인팅 책과 색연필은 하나씩 굴러다니고 있을 텐데 나는 결단코 머리가 굵어지고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에겐 전혀 힐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배경을 칠하는 알바를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애니다. 생각보다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한국에서 외주를 받아 작업되고 있는데 내가 받은 애니 또한 마찬가지이다. 배경 칠하는 건 어떤 일인가요? 말 그대로 배경을 칠하는 거다. 거창하게 설명할게 별로 없다. 선으로 된 파일을 받으면 샘플을 보며 칠하면 끝이다. 물론 더 말해보자면 빛에 방향에 따라 그림자도 칠해야 하고 배경의 분위기에 따라 어떤 효과도 넣어야 한다. 이 작품은 생각보다 굉장히 트렌디하기 때문에 배경을 보다 보면 어? 하는 게 종종 있다. 매번 보던 주인공의 집 안부터 유행하는 드라마나 영화까지 정말이지 다양하다. 그리고 스포 방지를 위해 비밀 서약까지 한다.


아무튼 이 모습들은 흡사 색칠공부와 닮았고 그 유행하는 피포 페인팅이다. 다만 이 작업은 디지털로 진행이 되고 언뜻 비슷해 보이는 색감이 아닌 정확히 똑같은 색감과 1픽셀도 비면 안 되는 꽤나 정교한 작업이다. 피포 페인팅과 닮은 이 작업을 하면서 힐링을 받느냐 한다면 절대 아니다. 강조되고 반복되는 작업은 저를 불안하게 한다구요. 네? 강조되고 반복되는 작업은 저를 스트레스받게 한다구요! 심리적 안정은 개나 줘버린 지 오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힐링을 하며 돈을 벌었으면 1석 2조로 참 좋았겠지만 그럴 성정이 되지 못해 스트레스받는다니 멋진 으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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