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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과 떠남의 경계에서

줌파 라히리 저, '내가 있는 곳'을 읽고

by 김영웅

정착과 떠남의 경계에서


줌파 라히리 저, '내가 있는 곳'을 읽고


줌파 라히리가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던 시절 썼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와 두 번째 책 '책이 입은 옷'이 산문집이었다면, 이 책 '내가 있는 곳'은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뒤로 물러나 있다. 이탈리아어에 조금 자신이 붙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소설가로서 이탈리아어 소설 한 편을 꼭 써보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형식은 달라졌고, 화자 뒤에 숨어 목소리를 아꼈지만, 세 번째 책인 이 소설에서도 앞의 두 산문에서 보였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은 그대로 이어진다.


이 책은 46개의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묘사와 서사를 동원해 들려주는 작품이다. 각 꼭지의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이 '내가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일상을 이루는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감정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 어디를 가도 온전히 정착할 수 없고, 동시에 늘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감을 여러 평이한 문장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화자가 처한 상황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 나아가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나는 45번째 꼭지에서 이 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아무 데서도'라는 제목의 꼭지이다. 화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조금만 진지하면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여러 군데에서 보여줌으로써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기법이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온 작품이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고, 평이하지만 결코 평이하지 않은 인간의 존재, 그것이 가진 원초적인 불안을 이렇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나 정착과 떠남의 경계에 서서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2. 책이 입은 옷: https://rtmodel.tistory.com/2055

3. 내가 있는 곳: https://rtmodel.tistory.com/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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