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지는 길목, 기억
11월
아침 기온이 섭씨 영상 1도를 가리킨다. 옷장에서 잠자고 있던 두툼한 재킷을 꺼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이 없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는 생각으로 온갖 불평을 해대며 지구온난화까지 진지하게 걱정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언제나 그 변화는 낯설기만 하다. 특히 추워지는 길목에 우두커니 서서 길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스레 서글퍼지기도 해서 적잖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찬바람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만큼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때문일까? 어느새 나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철학자가 된다.
왜 나는 추워지는 길목에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내 안을 계속 들여다보는 걸까? 추위에 움츠리는 만큼 생각도 내 안을 향하기 때문일까? 항상 겨울에 해가 바뀐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내 나이도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본능적인 깨달음도 나를 추궁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추위와 함께 온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누구나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행복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까지. 그러나 기억은 단 한 번도 망각을 이긴 적이 없다. 원한다고 해서 기억을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내 나름대로는 망각이라는 절대반지의 힘에 저항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차피 내 의지로 기억을 선택할 수 없다면, 먼 훗날에도 기억이 나도록 지금, 여기의 삶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억이란 알 수 없는 신비를 지닌다. 그리 중요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았던 단편적인 사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자꾸만 나를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불러들일 때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날과 동일한 감정에 휩싸여 동일한 냄새를 맡고 동일한 촉감을 느낀다. 기억이 망각을 이긴 적은 없지만, 어쩌다 이렇게 한 번 틈이 생기면 그 기억의 단편은 내 몸과 마음을 삽시간에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의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일 경우, 내 기억 속 그 사람은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뒷모습만 보인다. 아쉬움이랄까 미련이랄까 후회랄까 하는 감정이 만들어낸 그 사람의 얼굴이 뒷모습이기 때문일까? 앞모습을 볼 수 없는 나는 애달프다.
기억에 남는 삶을 살고 싶다는 내 바람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싶다. 아니, 단서를 하나 달고 싶다. 그 기억이 사람일 경우, 반드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 여기까지 이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이전보다 두렵고 떨린 마음이 된다.
11월이다. 좀 더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싶다. 나의 모든 기억을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말이다.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