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과 순종 사이
순응을 순종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순응은 수동적인 따름이고 순종은 능동적인 따름이다. 순응하는 자는 질문하지 않는다. 순종은 많은 질문과 의심 끝에 행해지는 고결한 자기 내어줌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중 하나가 자발적인 순종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생각 없이 순응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다는 것도 나는 믿는다.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은 채 모든 일에 순응적인 사람은 언젠간 생각하고 질문할 시기를 만나게 된다. 시기가 다를 뿐 그 순간은 도적 같이 임한다. 어쩌면 사람마다 다른 그 시기가 그 사람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너무 어린 나이에 그 순간을 맞이하면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자칫 평생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중에, 즉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서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수십 년간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확립되어 온 생활 패턴, 사상과 이념, 그리고 신앙의 색깔까지 자신을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관성적인 힘에 밀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고 보면 2차 성징이 이루어지고 사춘기를 맞이하는 십 대 중후반부터 시작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십 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갈등과 방황을 겪게 되는 이유도 알 듯하다. 이 시기에 별문제 없이 넘어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나 안정적이고 습관적인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삶의 흐름에 휩쓸려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나중에서야 뒤늦게 사춘기를 겪듯 인생의 중요한 질문들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게다가 나이 사십 정도가 되면 맞이하게 되는 특유의 혼란 및 성찰과 겹치게 되면 정말이지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나는 순응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언제나 묻고 따지고 왜 그래야 하냐고 대드는 편에 속했다. 학창 시절 몇몇 선생님들은 이런 나를 불쾌해하셨고 나의 질문을 싫어하셨다. 나는 그저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틀린 생각을 하는 저돌적인 아이였을 뿐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이 정해놓은 바른 길에서 벗어난 아이, 그래서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고 경계해야 할 것 같은 아이, 바로 그 아이가 나의 학창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쉬운 생각도 많이 한다. 그 시절,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걸 알고 내 의견에 귀 기울여주고 독창적인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단 한 분만이라도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진다. 만남은 하늘에서 주는 복이라 믿는 나에게 그런 복은 어렸던 과거의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어른들은 순응하는 아이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선생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아이, 하라는 대로 하는 아이, 말대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묵묵히 선생님을 따르는 아이. 나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시대가 그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그 선생님의 나이가 된 나는 아이들에게, 후대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순응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암묵적인 강요조차도 나는 폭력이라도 생각한다.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똑같은 짓을 후대에게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깊숙이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세계이므로 그 안에 갇힌 생각과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아닌 획일성에서 안정과 평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과연 정의와 공평이 있을까?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대화하고 순응이 아닌 순종을,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