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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Nov 22. 2024

Embrace

Embrace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영화 ‘Arrival’ 끝부분, 주인공 루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저 문장을 말하는 순간을 기억한다. 결연한 의지를 느꼈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을 만큼 경건해지는 순간이었다. ‘Embrace’라는 단어의 다른 측면을 알게 된 경이로운 순간이자 사랑에 푹 빠진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끌어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과거를 끌어안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미래를 끌어안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끌어안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하는 과거가 있으며, 자신의 못난 자아가 폭발하여 일을 크게 그르친 과거도 있게 마련이다.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가능만 하다면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까지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마음이 바로 자신의 과거를 끌어안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미래를 끌어안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나는 영화 ‘Arrival’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답은 충분히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헵타포드 (외계인)의 언어는 시제가 없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기억도 가능하지만, 미래의 기억도 가능하다. 루이스 역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게 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처음엔 환각처럼 드문드문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자신의 미래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그들과 소통하게 되면서 그 기억의 조각들이 미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이 한 남자와 결혼하게 될지도, 남편이 누구인지도, 그리고 불치병에 걸려 열두 살에 죽게 될 딸을 낳고 키우는 모습도 먼저 보게 된다.


딸 한나 (Hannah,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단어, 즉 palindrome이다)의 탄생과 죽음을 포함한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게 된 루이스는 작품 속 현재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과 함께 있다. 그 남자는 루이스에게 고백한다. 외계인을 만난 것보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 온 것 같다고. 그 순간 루이스는 남편과의 미래의 기억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미래를 먼저 보게 된 루이스에겐 이런 질문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태어나 오래 살지도 못하고 불치병으로 죽을 딸과의 잔인하고 슬픈 이별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그러나 루이스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운명을 느낀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내다본 미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한다. 비록 사랑하는 딸이 열두 살에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딸과 함께 보낸 시간들의 소중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죽음이라는 사건이 결코 십이 년간의 삶의 가치를 무력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루이스가 내뱉은 말이 바로 이 글을 여는 첫 문장이었다. 


나는 덧붙여 이 질문을 던져 본다. “다 알고도 시작할 수 있는가?” 내가 나의 미래를 다 안다는 가정 하에 그 미래에 딸의 이른 죽음처럼 가슴 아픈 일이 생기더라도 과연 나는 그 미래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저 문장을 말하는 루이스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왈칵 터진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그런 삶이 인간의 모든 삶이고 또 나의 삶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자신의 삶을 끌어안는 방식 중 두 번째 방식이다. 


과거의 못난 나를 끌어안는 나도 성숙한 나이지만, 미래의 내 삶을, 비록 그 삶이 슬픔과 아픔으로 얼룩져 있더라도, 끌어안는 나는 어쩌면 더 성숙한 나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긴 가치를 따라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 한 사람처럼. 


미래를 아는 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번째 방식, 즉 미래의 내 삶을 끌어안는 방식에서 현재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과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를 알 듯하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삶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어안는 삶. 깊고 풍성한 삶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참고로, 이 영화 시작과 끝에 나오는 수미쌍관구조의 장면에 삽입된 음악은 압권이다. 이것만 계속 틀어놓고 있던 적도 있었다.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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