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의 두 경로: 만남과 타이밍
얼마 전 포스팅에서 인생은 팔 할 이상이 운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운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도 했다. 이번 글은 그 운의 주요 경로를 내 경험에 비춰 두 가지로 얘기해 볼까 한다. 하나는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이밍이다.
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사람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반대로 가장 큰 저주도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가장 큰 축복도 가장 큰 저주도 받게 된다. 만남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만남의 대부분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 날 도둑 같이 찾아오게 된다는 점에서 운이라 할 수 있다.
혹시 만남이 운이라는 표현이 탐탁지 않은 분들을 위해 예를 세 가지만 들어보겠다. 하나는 부모와의 만남이다. 우리에겐 부모를 선택할 권한이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이를 운명이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기독교 신앙이 있거나 다른 신앙 체계에 속한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주관적인 렌즈를 거두고 가능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쨌거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만약 여기서 동의가 안 된다면 그냥 여기서 이 글을 그만 읽고 가시라.
두 번째 예는 자녀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자녀를 고를 수 없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태어나 유전자를 반반씩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태어난 자녀가 남편과 아내를 반반 섞어 놓은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녀는 독립적인 존재다. 유전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엔 훨씬 많다.
세 번째는 국가와의 만남이다.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이유는 한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영어권에서 태어나는 것을 적극 고려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생각은 나뿐만이 한 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국가를 선택할 권한도 처음부터 주어진 적이 없다.
이렇듯 만남은 운이다. 그것도 평균 수명 82세 정도의 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인생에서 위에 예로 든 세 만남은 정말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한다. 인생의 팔 할 이상을 결정짓지 않을까 싶다.
만남 말고 또 다른 운이 찾아오는 경로는 타이밍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기막힌 타이밍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 있는가? 하필 그때 내가 그 장소에 그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된 기억이 없는가? 이 타이밍이란 녀석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니 그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하나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다. 아사다 마오가 피겨스케이팅을 못한 게 절대 아니다. 그러나 김연아가 하필 동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에 세계정상이 될 수 없었다.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가 은퇴한 이후에 데뷔했다면 김연아 이후 세계정상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두 번째 예는 메시와 호날두다. 메시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신계의 축구선수가 하필 동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에 호날두는 이인자라는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는 자존심을 부렸지만, 객관적인 여러 증거들 (월드컵, 리그 우승, 챔피언스 우승, 발롱도르 등등)에서 호날두는 메시에게 밀린다. 호날두가 메시랑 같은 시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도 탑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어느 시대에 태어났는지는 철저히 운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만남과 타이밍은 우리 인생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좌지우지한다. 즉 누구를 만날지, 어느 국가에서 태어날지, 그리고 어느 시대에 태어날지는 철저히 우리 의지와 무관하다. 그리고 강력하게 우리 인생을 관장한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위에 예로 든 만남과 타이밍에 영향받지 않고 어떤 일을 독립적으로 실행하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 아마 거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국가의 보호 아래 살게 되고 그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며 자신의 부모에게 양육받게 되고 자신이 낳은 자녀를 행동이 아니라 존재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며 자기가 태어난 시대의 자식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는 이런 부분에서 철저히 무기력하다.
그렇다고 노력과 의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인생의 이 할 이하의 영역에서 변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팔 할의 영향 아래 속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마치 그런 운은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모두가 같은 영점에 서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의 확장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그렇다. 어차피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이미 인생의 팔 할 이상을 좌우하는 운에 걸러진 사람들이고 그들과 함께 우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이는 노력이나 의지, 혹은 개성이나 성품, 혹은 사상이나 신앙 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본적인 근거가 된다. 80킬로로 이동하는 두 자동차 중 하나가 85킬로로 속도를 올리면 더 빠르다고 느낄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건 80킬로미터의 속도가 아니라 5킬로의 차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게 5킬로의 차이밖에 없고 마치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거시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모두 80킬로의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곳의 사람들은 100킬로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고 50킬로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가 속한 작은 세계 안에서만 갇히지 않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전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자기 객관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만남과 타이밍이 인생의 팔 할 이상이고, 개인의 노력과 의지 및 개성 같은 것들이 이 할 이하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도, 팔 할과 이 할의 차이 때문에 이 할을 무시해서도, 팔 할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과대 의지해서도 안 되겠다. 이 할이라고 해서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나, 팔 할이라고 해서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믿는 사람이나 둘 다 어리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고의 연쇄로 말미암아 운명론자로 빠지지도 않고, 자기 의지대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도 않다. 팔 할과 이 할은 결국 우리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줄 뿐 정작 우리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객관적 사실을 몰라도 되는 것일까?
비록 결론이 그 사실을 모르든 알든 상관없이 같을 수 있더라도, 나는 이런 사실을 아는 편이 모르는 편보다 당연히 낫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바보보다 고뇌하는 지혜자가 낫다고 믿기 때문이며, 적어도 한 동네에 태어나 그 동네에서 죽지 않을 거라면 자신이 80킬로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을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객관적인 좌표는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눈이 장착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나만 알거나 내가 속한 우물 안에서만 행복한 사람은 시대착오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거시적인 부분에서는 운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개인의 역량이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