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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Nov 26. 2024

나는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끝을 예감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졌던 이유는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또 해버렸다는 사실로 인한 자책감이었다. 나는 나의 불완전함을 나의 부족함이라 여겼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찰과 반성의 일환이라 믿었다. 자기애와 자기 연민의 어정쩡한 경계에 서서 뚝심 있게 버티는 게 성장하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화살을 남이 아닌 나에게 돌리는 행위는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동시에 대단한 사람도 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꽤 유용했다. 나의 불완전함을 탓하기만 하면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정작 누가 그랬냐며 화를 내던 사람들도 내가 먼저 나서서 나의 불완전함을 탓하면 금세 잠잠해졌다. 나로서는 겸손의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고, 나는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화합의 통로 그 자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을 하면 모든 다툼도 사라질 거라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오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 오류에서 해방되던 순간은 내겐 일종의 구원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의 비겁함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나의 불완전함이 나의 부족함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불완전함을 탓하고 희생양 삼아 마치 잘만 하면 완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과거를 단순화시켜 버리는 비겁함이야말로 나의 고질적인 부족함이었다는 것을.


불완전함을 탓하는 행위가 비겁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행위가 사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다고 말만 했을 뿐, 어디가 불완전한지, 왜 그랬는지, 어떻게 하면 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숙고는 정작 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비겁하다 말한다. 비겁함은 삶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언제나 해답처럼 나타나 깊은 성찰을 가로막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탓하는 행위는 자신을 돌이켜 볼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쉽고 간편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비난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아 희생양 삼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희생양 삼는 행위는 언제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전제로 할 뿐 그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희생양이 아닌 희생양 삼은 자들에게 있는 법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고백하는 행위 자체의 파괴력 뒤에 숨어 뭇사람들로부터 오는 존경 어린 눈초리를 은밀히 즐기고, 그것에 기반하여 스스로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상황 전개는 중독성이 강하다. 적당한 연기력만 갖추면 탁월한 사기꾼이 될 수 있다. 타자도 속이지만 자기 자신도 속이고 마는 비극적인 사기꾼 말이다.


우린 모두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간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행위는 나는 인간이다,라는 말과 다름없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겸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겸손의 출발은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더 이상 나는 완전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불완전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질문을 바꾼다. ‘나는 얼마나 완전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얼마나 사랑하지 못했는가’로. 이 질문 앞에서도 여전히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더 이상 비겁해지지 않는 것,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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