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방관과 상대주의 사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방관자에 머무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회색분자, 양다리를 걸친 우유부단한 자의 이미지로도 비치는 그 사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중간은 어디인가? 치우치지 않는다는 건 허상 혹은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치우치지 않고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모델인가?
한 우물 안에 갇혀 바보처럼 행복하다가 어느 날 어떤 만남을 계기로 우물 밖의 세상을 알게 되고 자기의 안전지대였던 우물이 온 세상이 아니라 여러 우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우물 밖을 스스로 걸어 나올 때는 자칫 습관에 의해 살던 관성의 반동적인 힘으로 인해 우물 안의 삶과 정반대 되는 삶을 극단적으로 취하려고 하는 시기를 거칠 수 있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데, 그 시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신의 현재 좌표가 무엇인지 혼란에 빠지는 시기를 그다음으로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물 밖을 스스로 걸어 나왔다면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길은 차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반대의 집단으로 갈 수 도 없다. 반동적인 힘에 이끌리는 시기도 끝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애매한 중간 지대에 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질문이다. 이 중간 지대는 과연 우유부단한 자의 회색지대일까, 아니면 화합과 통합의 장이 될 수 있을까?
이전 포스팅에서 내가 생각하는 초월자의 모습을 묘사했었다. 나는 바로 위에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그 초월자의 모습을 다시 빌려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회색지대인지 화합과 통합의 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먼 길을 거치고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 자의 모습을 띤다고 했다. 같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이런 초월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방관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맞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자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다. 대신, 초월자는 우물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 둘을 포용하면서도 그 둘을 초월하는 그 무엇에 이끌려 삶을 살아가는 이미지로 내게 다가온다. 우물 안과 밖을 일대일로 섞는다고 해서 중간이 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무런 기준도 없이 둘 다 무조건 맞다고 하는 비논리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해서 화합과 통합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진정한 중간은 둘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내 눈으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나는 조용히 다짐하게 된다. 적어도 방관자나 상대주의자로 빠지면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된다.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