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3ㅣ한국은 정말 좋은 나라야
서울 백수, 영국 백수, 부산 백수 그리고 이제 보스턴 백수다.
지난 31일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리가 저릿저릿한 14시간 비행을 끝내고 보스턴 로건 공항 터미널로 나왔을 때 나를 반긴 건 아무도 없었다. 내 몸만 한 캐리어 두 개에 보스턴백(그나저나 보스턴백은 어쩌다 보스턴백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두 개를 낑낑 거리며 카트에 밀고 우버 탑승장을 찾다가 포기하고 눈앞에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30분 정도 이동해서 도착한 아파트는 의외로 정말 마음에 들었다. 대학원 기숙사는 9월부터 입주가 가능해서 방학 동안 집을 비우게 된 MIT에 다니는 학생방을 한 달 간 sublet 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메신저 몇 통으로 덜컥 구한 방이라 내심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ㄷ자 적벽돌 건물 중앙으로 난 입구에서부터 평화로운 풍경이 나를 안심시켰다. 하버드와 MIT가 붙어있는 Cambridge 지역은 물가 높은 보스턴 안에서도 렌트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지역이다. 에어비앤비로 방 한 칸을 한 달에 $3000을 넘게 주고 구해도 숨 막히게 좁은 다락방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웬걸, $1800을 주고 빌린 아파트는 미국 스케일로 리셉션도 복도도 집도 방도 모든지 널찍널찍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방과 화장실이 두 개씩 있는 집에서 나 혼자 방하나 화장실 하나를 쓸 수 있는 집이다. 예상보다 더 넓은 방에 주방 집기며 양념들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기대 이상으로 만족이었다. 방주인인 Riyah가 한참 건물 구경을 시켜주고 떠난 후 드디어 샤워를 하고 꿀같은 잠에 들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잠잘 곳이 생겼다.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 공항에서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 사 온 ESIM이 활성화가 안돼서 애를 먹었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 없이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원래는 일요일에 보스턴에 사는 친구의 지인을 만나서 같이 개통을 하기로 했는데 급한 마음에 이틀 먼저 혼자 at&t 매장으로 향했다. 원래는 혼자 와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문제가 많아 애를 먹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한국의 서비스 정신과는 다르게 미국의 서비스 정신은 한마디로 '어쩌라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매장에서 씨름을 하다 겨우 개통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와서 APP을 깔아보니 아이폰을 갤럭시 패드로 등록해 놨다. 옆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치던 흑인 아줌마가 분명 갤럭시 패드를 들고 있었다^^ 모델만 잘못 등록했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혹시 아예 다른 기기를 등록했을까 싶어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넣어 또 한 시간 정도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끝에 겨우 기기를 새로 등록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핸드폰 신호가 아무것도 잡히질 않네? 세상 친절하던 Julie는 기기변경만 해놓고 번호 활성화를 안 해줬다! 한국 같았으면 화가 나서 무슨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냐고 당장 민원이라도 넣었을 텐데 미국에서는 화도 안 난다. 화를 내봤자 소용도 없다. 부처님의 마음으로 또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했지만 신호가 안 잡히니 전화도 안 간다. 미소를 잃지 않고 와이파이로 채팅 상담을 열었고 한참 키보드를 두드린 후에야 드. 디. 어 잘 작동되는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두 번째로 핸드폰 번호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해결할 일은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 체크카드가 이미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신용카드가 캐시백이나 리워드가 많아서 훨씬 이득이다. 한국에서 이것저것 비교를 해보고 신용카드를 신청했는데 그게 기숙사 주소로 자동 발송이 돼버렸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받아서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기숙사로 찾아갔다. 살랑살랑 여름바람에, 잔디에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한국은 40도라는데 여긴 의외로 24~27도 정도를 오가는 걸어 다닐만한 날씨다. 이곳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들도 강아지들도 꽤나 부러워지는 장면이다. 보스턴에는 작은 포켓공원들이 많은데 적벽돌 건물들 사이사이에 파란 잔디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그림 같다. 그렇게 한참 부러운 눈길을 떼지 못하며 도착한 기숙사 리셉션에서 사정을 설명하니 우편물 꾸러미를 한참 뒤지더니 내 앞으로 온 우편물을 찾아줬다. 역시! 포기하지 않고 와보길 잘했다. 카드 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해서 1~2주를 기다리는 것보다 5분 산책을 나온 편이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미국 번호로 이것저것 인증을 하고 나니 어렵지 않게 카드 등록이 됐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신용카드가 생겼다.
보스턴 도착 3일 차에 잘 곳도 있고 핸드폰 번호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다!
이제 보스턴 백수로 살아갈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사실 운전면허도 발급해야 하고 여권 갱신도 해야 하지만, 이런 관공서 일들은 미국 특성상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두 달은 잡아야 한다. 당장 오늘 운전면허 발급 신청을 했더니 한 달 뒤에 센터 방문 약속을 잡아줬다. 한국 정부24 홈페이지에 경의를 표한다. 대한민국 만세!
불편한 것 투성이에 한국에서 처럼 말빨을 세울 수도 없는 먼나라에서 답답하면서도,
그림같은 빨간 벽돌 건물과 파란 잔디들을 보고 있으면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드는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