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런던이라서, 그러나]
한 달 동안의 방학이 끝났다. 말이 방학이지, 해야 할 일을 산더미로 남겨둔 채 수업만 잠시 쉬는 30일이었다. 쉬라는 건지, 할 일을 미리 해두라는 건지. 대학원 일정은 아직까지도 적응이 안 된다. '이거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거는 저렇게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어느샌가 불쑥 나타나면,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럼 나도 모르게 조급해지고 불안해진다. 방학인데도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다니. 그래서 나는 종종 나도 모르게 바빠진다. 몸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이럴 땐 차라리 몸이 바빴으면 좋겠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에게는 치트키가 있다. 불안을 우는 아이 달래듯 도닥이는 방법. 과열된 머리와 지친 마음을 돌보고, 놓쳐버린 나의 속도와 호흡을 되찾을 수 있는 안성맞춤. 바로 요가다.
[Our Spring Offer is Here!]
SPRING OFFER, 6 Classes for £60
(...)
부담스러운 요가원 멤버십 가격에 등록은 하지 못하고 방구석 요가로 나를 돌보던 와중, 때마침 반가운 메일을 받았다. 바로 눈여겨보던 동네 요가원의 '봄맞이 특가' 메일이었다. 방에서 하는 요가와 요가원에서 하는 요가는 질이 다른 법.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어 곧장 결제를 하고, 수업을 예약했다. 와, 드디어 런던에서 요가원이라니. 첫 수업이 있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매트를 들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요가원은 집에서부터 도보로 15분. 조금 답답해 보이는 영국식 오래된 집들과 배터시 파크를 지나니 그곳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보였다. 왠지 길목부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꼭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돌길을 지나 곧장 스튜디오로 들어가니, 수강생들을 맞이하고 있는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더 보탰다.
"여기 처음 오셨나요?"
"네. 오늘 처음 와봤어요!"
"혹시 전에 요가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6개월 정도 했고요. 최근엔 잠시 쉬었어요."
"오 그렇군요. 오늘 편안한 시간 되길 바랄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와 짤막한 인사를 마치고, 나는 매트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잠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니 사선으로 나 있는 유리창 사이로 구름이 동동 움직이고, 잎들이 나풀거리는 게 보였다. 진정, 셀프케어의 시간인 것이다. 75분 동안 선생님의 말처럼 나는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고 상쾌하던지. 아무래도 이 60파운드, 결제하길 참 잘했다. 그리고 아쉬웠다. 6번만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름의 계획을 짰다. 일주일 중에 가장 몸과 마음이 무거운 날에 요가원을 가기로. 마치 상자에 들어있는 맛있는 마카롱 여섯 개를 아껴먹는 것처럼. 이럴 때면 괜스레 대전에서 다녔던 요가원이 그립기도 하다. 거긴 이 가격으로 한 달 동안 매일 갈 수 있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요가원을 다니기 시작한 건 대전에 머물던 작년 여름이었다. 요가에 큰 뜻은 없었다. 단지 미친 듯이 더운 날씨에 몸이 쓰러질 것 같은 조바심에 등록했던 운동이었다. 과연 내가 3개월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이미 3개월치 등록을 했으니 꾸역꾸역 갈 줄 알았는데, 웬걸 요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에게 꼭 맞는 운동을 찾은 느낌. 예상치 못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는 요가에 폭 빠졌고, 어느새 내 서랍장엔 몸에 딱 맞는 레깅스보다 보드랍고 편한 요가복들이 한 두 벌씩 늘어나게 되었다.
요가는 시끄러운 내 속을 잠재워준다. '옆에 사람 진짜 잘한다. 난 언제 저렇게 되지. 저 요가복 진짜 예쁘다, 어디 거지? 요가 끝나고 뭐 먹지. 아, 이번 주엔 이거 다 마쳐야 하는데 하기 싫다.' 이놈의 속은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가만히만 두어도 절로 시끄러워지는데 마치 요가가 이걸 멈추는 연습과 같다. 속이 잠잠하지 않으면 몸으로 곧장 티가 나는데, 매트 위에선 더 정직하게 보인다. 잘 되던 동작도 잘 안되고, 갑자기 흔들리고, 그러다 무너지고.
그러면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내 속에서 새어 나오는 잡음을 또 지워버린다. 그러면 다시 신기하게도 몸의 균형이 잡히고 동작이 된다. 이건 마치 나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문제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잡히고 나면 요가는 내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때 그 순간에, 내가 하고 있는 호흡과 동작, 그리고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어떠한 판단도 평가도 다 내려놓고, 잠잠히. 어떤 날엔 매트 위에서 한쪽 다리로만 서 있는 자세가 잘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요가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흔들리는 나를 그냥 바라보세요. 나무도 바람에 흔들립니다. 흔들려야 균형을 찾을 수 있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울컥했다. 흔들리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 자신을 채근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나는 왜 그렇게 나에게 가혹한 건지. 흔들리는 자세를 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를 그저 바라보고 있자니, 이건 참 따뜻한 포옹 같았다. 그날,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뾰족하게 내뱉던 말들은 날숨과 함께 뱉어버리고, 대신 따스한 말들을 산소처럼 들이마셨다.
흔들려도 괜찮아. 지금 균형을 찾는 중이잖아. 또 흔들리면 다시 또 균형을 잡으면 돼.
이만하니 내가 왜 요가에 폭 빠졌는지 확실히 알겠다.
방학이 끝나고, 개강을 했다. 그리고 또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바깥에서 부는 것 같으나 이번에도 내 안에서 세차게 불어댄다. 휘청 휘청. 이럴 때일수록 매트 위에서 요가를 할 때의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보드랍고 다정하게 나를 도닥이며 순간에 집중한다. 호흡이 가빠지지 않도록, 머리와 마음이 시끄럽지 않도록. 그래서 너무 많이 지쳐버리지 않도록.
4월이 지나면 바쁜 일정도 좀 정리가 되겠지. 요가원에 가는 마지막 수업은 이 달 마지막 날에 가야겠다. 매트 위에서 굳은 몸과 마음을 풀며 4월과 굿바이를 할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앞으로의 며칠을 거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가오는 5월엔 집 앞 공원에서 요가를 하며, 이 계절을 온몸으로 누리리라. 상상만 해도 콧등 위로 따스한 봄바람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