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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Oct 21. 2024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고맙다는 말,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하나 더 붙여보자면 수고했다는 말.

이 말들이 입에 자연스럽게 붙기까지 꽤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런 말들을 마음에 숨겨두었다 아주 가끔 편지에 쓰는 사람이었다. 말로 꺼내는 건 쑥스러우니까. 말보다는 행동으로 진심을 보이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시작했던 건 전 연애였다.

 

“나도 너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넌 왜 그런 말을 안 해줘?”


예쁜 말들을 많이 듣고 자랐던 그는 나에게 그런 말들을 원했다. 내가 이런 말들을 많이 듣고 자랐다면 괜찮았을까,라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했고, 그 생각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내가 연습하면 괜찮겠지. 우리 사이가 괜찮겠지. 하지만 관계는 끝이 났고, 엄한 불똥은 부모님께 튀었다. 뒤늦게 사춘기가 왔던 것일까, 그동안 참고 참았던 것이 연애의 종지부를 빌미 삼아 터져 버렸던 것일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엄마랑 아빠가 나한테 알려준 게 뭐가 있어? 둘이 맨날 싸우고 피하기만 했지 미안하다는 말을 알려줬어, 고맙다는 말을 알려줬어? 나한테 잘했다, 수고했다고 말한 적 한 번이라도 있어? 없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해. 사과하라고. “


목이 쉬어라 울분을 토하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엄마와 동생,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래, 네 말이 맞다. “라는 말만 남기던 아빠.


난 그렇게 부모에게 탓을 하고 싶었다. 이게 다 내가 배우지 못해서라고. 내가 어렸을 때 당신들을 통해 배웠으면 난 수월했을 거라고. 이 끝나버린 연애도 그렇게 아프게 겪지 않았을 거라고. 한바탕 탓을 돌린 후에 남은 건 억울함이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들을 나는 내가 노력해서 바꿔야 한다는 것이. 그래도 바뀌어야만 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런 것도 책임져야 한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삶에게 한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어느 날, 삶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공평하진 않다고.


회사에서였다. 업무 상 여러 명의 시니어 퍼블리셔(senior publisher)들을 서포트하고 있는데 그중에 엄마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영국인 여자분이 있다. 캐롤라인. 친절하고 예의 있고 차분한, 그리고 늘 적당한 거리를 두는. 상대의 의견에 공감을 하지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땐 눈을 감더라도 차분히 전달하는. 회사에서 바라본 캐롤라인은 이름처럼 우아했다. 전형적인 50대 후반의 영국인 여성 같았달까. 그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지내면 참 좋은데 그걸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날도 그때 벌어진 일이었다.


긴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캐롤라인을 오피스에서 오랜만에 만난 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자리로 넘어가 해맑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실수했구나, 감지하고 나는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나며 일 때문에 정신없었는데 내가 괜히 말 걸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던 날.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캐롤라인과 온라인으로 미팅을 하는데 일 얘기를 마친 후, 그녀가 입을 떼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하려고. 지난번에 오피스에서 네가 나에게 왔었는데 내 표정이 너무 차가웠던 거 사과할게. 미안해.(sorry 보다 더 정중한 apologies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 휴가 끝나고 돌아온 날이라 이메일이 많이 쌓여서 내가 좀 예민했는데 그게 너에게 보였던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어머,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이해했어요. 휴가 후여서 정신없으신가 보다 했어요. 제가 메시지를 먼저 보낼 걸 그랬어요. 감사해요. “


이렇게 우아한 사과라니. 이런 사과를 받다니. 엉킨 실타래 하나가 풀린 것 같은 묘한 느낌. 지나갔다.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수고했다는 말을 배우지 못했다고 분노에 가득 찼던 때가. 계절이 바뀌듯이 내 인생도 다른 곳에 도달했구나. 이제부턴 내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그리고 누군가가 그런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맞아. 이렇게 배우면 돼.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해도 괜찮아.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달라지고 싶은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네 주변이 너를 도울 거야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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