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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h Feb 23. 2024

"숨기고 있는 내 진짜 모습이 죽도록 싫지만"

만화/애니메이션 <모브사이코 100> 후기

1. 초능력을 특별함의 반열에서 끌어내리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나 반짝거리는 지적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가족 영화라 불린다. 그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위협하는 악당들과 싸운다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에 이건 선후가 바뀐 서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가족을 위한다는 상당히 사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을 이끄는 등장인물들이 당면한 과제가 우리네가 시달리는 세속적인 고민 - 주로 집세를 내고 생활비를 벌어 삶을 유지하는 것 - 과 달리 '세계를 구한다'는 대의 수행이라는 점에서 결국 MCU는 전통적인 히어로물이다.


카게야마 시게오(모브) 첫 등장 (<모브사이코 100> 애니메이션 시즌1 1화)


반면 초능력자 주인공, 카게야마 시게오(이하 '모브')의 성장기를 그려낸 <모브사이코 100>은 작품 전반에 걸쳐 초능력을 '달리기가 빠르다'와 같은 한 개인의 특성으로 환원하여 초능력을 특별함의 반열에서 끌어내리고, 초능력이 아닌 모브의 사춘기에 초점을 맞추어 일상적 전개를 이끌어나감으로써 전통적인 히어로물과 거리를 둔다. 우선 작품에서 그려지는 작중 인물들의 주요 고민과 갈등(진로 고민, 이성 문제, 열등감 등)은 모두 그들이 중학생이기에 겪는 지극히 보편적인, 그러나 그 나이대에선 무척이나 심각하고 위중한 것들이며, 결코 초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모브는 초능력을 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과 달리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동생을 높게 평가하고, 초능력이 아닌 자신의 다른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육체개조부'에 가입하여 체력 단련에 힘쓴다. 게다가 그의 가장 큰 고민은 그의 타고난 능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짝사랑 상대인 츠보미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듯 <모브사이코 100>은 자신만의 고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누구나 겪기에 특별하지만도 않은 사춘기의 일상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며, 이로써 관객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잊혀가던 풋풋함의 정서와 학창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한껏 건드린다는 점에서, 초능력이란 소재를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 드라마로 여겨진다.




2. Con Artist, Reigen Arataka


그러나 내가 <모브사이코 100>에서 느낀 감동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모브의 성장보다는, 레이겐 아라타카(이하 '레이겐')라는 등장인물의 성장에서 기인한다.


영등등 상담소 간판 (<모브사이코 100> 애니메이션 시즌1 1화)


정수기 영업직으로 근무하던 레이겐은, 어느 날 일에 염증을 느껴 회사를 그만두고 충동적으로 '영등등 사무소'라는 수상한 상담소를 개업한다. 그러나 그에겐 영능력도 초능력도 없다. 그래서 레이겐은 실제론 악령과 관련 없지만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 악령 탓이라 믿는 고객의 문제(요즘 들어 이유 없이 어깨가 뻐근하다)를 요령 있게 해결(마사지)하며 상담소를 운영해 나간다. 그러던 중, 가끔 초능력을 제어할 수 없을 때가 있다며 상담소를 방문한 초등학생 모브를 응대하게 된다. 처음에 레이겐은 모브를 적절히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 하나, 그가 정말 초능력자임을 알게 되자 모브에게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그를 스카우트한다. 그리하여 모브에게 '스승'이라 불리게 된 레이겐은 모브에게 의탁하여 제령 작업을 이어나간다. 비록 모브에게 영능력과 관련된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레이겐은 모브가 갖가지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을 때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며 모브 마음속 응어리를 따스하게 녹여준다.


그렇다고 레이겐이 본받을 만한 이상적인 어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그의 사업은 사기성이 매우 짙으며, 그로 인해 레이겐은 작중에서 대중들의 질타를 받는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일삼고, 모브에게 3000원 꼴의 부당한 시급을 제공하며, 끝의 끝까지 모브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모브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기도 한다("툭하면 이용당한다니까. 너도 어지간히 성장하지 않는구나." 시즌2 6화). 그러나 레이겐은 자신의 행동이 분명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면 레이겐은 왜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며 자신을 꾸며내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브가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하기 위해 레이겐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고민하는 모브에게 "꾸미지 말고 널 있는 그대로 보여 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돼."라고 말하지만, 이후 모브가 돌아간 뒤 동료인 세리자와가 뜻밖의 조언이었다 말하는 것에 레이겐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 틀림없이 차일 테니까."라고 답한다(시즌3 9화). 자신은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과 그 기저에 자리한 자기혐오가 여실히 드러나는 답변이다.




3. "숨기고 있는 내 진짜 모습이 죽도록 싫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지 않나? 종종 내가 싫을 때가 있는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었다. 밝은 엄마와 무던한 아빠, 그럭저럭 사이가 나쁘지 않은 동생. 그러나 나는 엄마와 친했고 엄마를 사랑했으나, 엄마의 타고난 성향으로 인한 부주의함과 그와 조부모 간의 애착 관계에서 비롯된 무심함 때문에 때로 외로웠다. 엄마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때때로 나와 동생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러고 나면 우리에게 미안했는지 말로 사과를 하는 대신 맛있는 밥을 해주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며, 나는 엄마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맞았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작았고, 때릴 구석이 없었으며, 맞아선 안 될 존재들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조금 충동적이긴 해도 말로 잘 타이르고 감정을 읽어주기만 하면 너무나 사랑스럽게도 내 말에 따라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다.


일련의 감정을 겪은 이후, 20대 초반의 나는 엄마가 그때라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어른스러운 양육자의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엄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나는 엄마도 싫었지만, 그걸 기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역겨웠다. 비록 미움은 시간이 흐르며 안개보다도 흐릴 만큼 희석되었으나 그 당시 나를 휩쌌던 감정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과거의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내 행동과 성격 전반에 그 흔적을 남겨 놓은 후였고, 그걸 발견할 때마다 나는 견딜 없을 만큼 내 모든 게 싫어졌다. 더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나 큰 부끄러움과 수치와 슬픔을 느꼈다.


순응의 순간은 몇 번의 부정 끝에 찾아왔다. 그걸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엔 글쎄, 지금 나는 그걸 알게 되었기에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느낀다.


그래서일까. 나는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허울을 벗어던지는 레이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동생을 다치게 한 이들에게 분노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초능력을 써버렸던 모브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초능력을 써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단 것 큰 충격을 받아 이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그러나 표정 없이 살아오던 모브는 마지막 화 고백 편에 이르러 짝사랑 상대인 츠보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러 가던 중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가 그간 억압해 온 감정은 폭발한다. 그리하여 초능력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 모브를, 레이겐은 막아선다. 그리고 그에게 '고백'한다. "나는… 나에게는 영능력도! 초능력도! 아무 능력도 없어! 거짓말…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시즌3 12화)


자신이 그간 거짓말을 해왔음을 고백하는 레이겐 (<모브사이코 100> 시즌3 12화)


그리고 훌쩍이는 레이겐의 모습에 모브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난 숨기고 있는 내 진짜 모습이 죽도록 싫지만 (중략) 넌 그대로도 괜찮아. (중략) 이제 너 자신을 받아들여 줘. 너라면… 모브라면 그럴 수 있다는 걸 난 알거든."이라는 레이겐의 말을 듣고 모브는 그간 눌러왔던 자신의 감정들을,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들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렇게 모브는 애니메이션 시즌3 12화, 그리고 만화 100화에 이르러, 온전한 100%의 자신이 된다. "카게야마 시게오 100%"


억압했던 자신의 모습과 악수하는 모브 (<모브사이코 100> 애니메이션 시즌3 12화)
카게야마 시게오 100% (<모브사이코 100> 애니메이션 시즌3 12화)


아무래도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 레이겐은 그래도 모브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었던 듯하다(시즌2 7화). 결국 <모브사이코 100>의 결말에서 레이겐을 통해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부족함이 많은 우리라도, 좋은 어른이라기엔 아직 갈 길이 먼 듯한 우리라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는, 그냥 그렇게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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