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2011년 7월부터 나는 이스라엘의 스데보케르(Sde Boker)에서 6개월간 '키부츠(Kibbutz)' 생활을 하였고, 그 경험들은 스물두 살에 불과했던 내게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는 키부츠 생활에 대한 기록을 꼭 남기리라 했던 것이 내 의지에 모자람으로 계속해서 미뤄졌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어떠한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최근 뉴스에서 본 '키부츠'라는 단어는 내게 그저 잠깐의 과거를 떠올리게 할 뿐이었는데, 오히려 남편이 적극적으로 글을 써보라며 권유하였다. 그래서 이참에 본격적으로 기록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한동안 나의 브런치엔 2011년 7월부터 12월까지 이스라엘의 스데보케르에서 키부츠 발룬티어로 지낸 생활을 적어나가려 한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낸 일기(또는 편지)에 근거하여 개인적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됨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누군가가 있다면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또한 어떠한 내용들은 많은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 현재와 다를 수도 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로 참고와 이해를 부탁드린다!
나의 기록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키부츠'란 무엇인지, '키부츠'란 어떤 곳이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아래의 간단한 정보는 키부츠 공식 히브리어 사이트와 국내 사이트, 나무위키 및 위키백과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을 참고하였다.
- 키부츠의 시작: 1909년 시오니즘 운동 중에 생겨난 유대인들의 집단농장 및 사업소 공동체
- 이스라엘 내부에 존재하는 키부츠: 262개(https://www.kibbutz.org.il/he/node/10525)
- 키부츠 중 발룬티어를 받는 곳: 17곳(https://kibbutzvolunteers.org.il/kibbutzes)
- 키부츠 인구: 약 8만 명(크고 작은 키부츠에 따라 최소 60명에서 최대 2,000명으로 일정하지 않음)
- 특징: 키부츠 공동체 구성원의 기본적인 조건은 어떠한 사유재산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생산과 공동 분배가 기본적인 원칙이니, 키부츠 안에서의 모든 것들은 공동 소유인 것이다. 그리고 키부츠 사업소를 포함한 공동체 외부에서 벌어들인 수익 또한 모두 키부츠 공동체에 귀속된다. 공산주의 집단과는 달리 서구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협동조합에 가까운 모습이다.
- 역사: 1967년 이후부터 전 세계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키부츠를 향해 모여들었으며 20세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자유 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의 한 사례이자, 성공한 몇 안되는 자발적 사회주의 공동체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 현재: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점차 쇠퇴하고 있다. 키부츠의 경영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감소하고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있다.
- '키부츠' 단어의 뜻: 히브리어로 '모임'을 의미함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쉽게 말하여 하나의 경제 공동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무수한 외세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국가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로 돌아오면서 수 세기 동안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기로 한다. 이때 여럿이서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하는 형태의 공동체가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키부츠의 유래이다. 빈부의 차이 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눠 갖는 철저히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키부츠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 따라서 키부츠 내에서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유하는 경제형태를 이룬다. 이처럼 마을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 또한 사람들이 나누어서 함께 하며 내부 조직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적인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키부츠는 자발적 공동소유를 앞세워 등장한 집단농장 조직으로 초기 이스라엘 건국에 큰 기여를 했으나, 사회주의 쇠퇴와 함께 80년대 후반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한 때는 경영난으로 257개 집단농장 가운데 절반가량이 파산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90년대에 들어 자본주의와 글로벌화의 물결에 따라, 그리고 자유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키부츠를 속속 떠나게 되자 키부츠는 잠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몇몇 키부츠만 해체되었을 뿐 상당한 수의 키부츠들은 개혁을 감행하여 살아남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노동을 위한 인력이 부족해진 키부츠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 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아래는 키부츠 자원봉사자의 모집 요강 및 혜택이라고 보면 되겠다.
- 지원 자격: 만 18세~만 35세 이하의 심신이 건강한 남녀, 간단한 생활영어 가능자, 최소한 8주 이상 참가 가능자, 범죄경력이 없는 자
- 참가 기간: 2개월~6개월(연장신청 시 최대 1년까지 가능)
- 참가 가능 시기: 연중 가능
- 참가 인원: 보통 매주 출발하고 있으며 개별 또는 2명이 함께 출발
- 수속 기간: 보통 1~2개월 소요
- 봉사 시간: 하루 6~9시간 키부츠 내의 여러 가지 일을 돕는다.
- 봉사 업무: 체류하는 키부츠에서 운영하는 과수원, 정원, 동물원, 식물원, 목화밭, 목장, 양계장, 공장, 호텔, 유치원, 상점, 식당, 주방, 세탁소 등에서의 단순노동
- 수당: 키부츠에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숙식과 용돈(USD 70~150/월)을 제공하고 키부츠 내 각종 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밖에 매월 휴가가 2~3일 정도 주어지고 무료로 발룬티어 트립을 진행하기도 한다.
- 여가와 휴일: 근로 시간 이외의 시간은 모두 자유시간이며 외출도 가능하다.
- 참가국: 미국, 한국, 영국,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에콰도르, 콜롬비아, 스웨덴, 멕시코, 호주, 캐나다, 터키, 인도, 네덜란드, 덴마크, 폴란드, 브라질, 뉴질랜드,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러시아, 벨기에, 헝가리, 과테말라, 스페인, 노르웨이, 짐바브웨, 핀란드,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라트비아, 마케도니아, 칠레,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우루과이, 홍콩, 필리핀, 파나마, 페루, 코스타리카, 포르투갈 등
키부츠의 모집 요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 우선 세계 각국의 젊은 청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것은 무지 근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소정이긴 하나 매달 봉사에 대한 몫을 달러로 지불하고,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으며, 때로 이스라엘 전역을 무료로 여행도 시켜준다는 것.
하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잦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였다.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으로 나라 전역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가 키부츠 생활을 하던 해인 2011년의 12월,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사망했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언론들은 연일 김정은 사망에 대해 보도하며 대한민국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 기사를 내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인 나를 보면 한국 상황에 관해 묻거나 가족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주곤 했다. 당시엔 웃겼던 것이 허구한 날 이스라엘 라디오와 방송에서는 테러단체가 이스라엘 주민들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거나, 군인을 공격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는데... 막상 그런 나라의 국민들이 내게 나라의 안위를 물으니 그러한 상황이 내겐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상황은 위와 같았지만,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매일 같이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찾아왔다. 텔아비브(Tel Aviv)에 위치한 키부츠 본부에는 각국의 젊은 청년들이 인기 있는 키부츠를 가기 위해 대기를 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원봉사자가 아닌 키부츠 공동체 내 유대인들의 생활은 어떨까? 앞서 말했듯이 키부츠 내의 모든 재산은 공동소유이다. 따라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판매하여 소유하는 경제형태를 이룬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대신 키부츠에 소속된 모든 주민들은 의식주, 자녀 교육, 의료혜택, 생필품 등 삶에 필요한 대부분을 키부츠로부터 제공 받는다.
키부츠의 초반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차차 공업화되고 현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키부츠의 주된 산업 형태도 변모하여 이제는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키부츠도 있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식당이나 게스트하우스, 호텔 등 서비스업을 주된 산업으로 운영하는 키부츠들도 생겨났다.
키부츠의 농업 분야는 과수, 채소, 화훼, 낙농, 양계 등 다양한데 이중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하는 키부츠가 있는가 하며 두 가지 이상을 복합영농하는 키부츠들도 있다.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키부츠에서는 식품이나 유제품 가공, 직물이나 가죽 등의 가공염색, 기계나 전기부품 생산, 장난감이나 가구제조, 다이아몬드 세공 등 각기 특성에 맞는 공업을 개발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관광지 주변 지역에 있는 키부츠에서는 게스트하우스나 호텔 등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성경의 땅 이스라엘, 그곳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들과 고고학 발굴지로 가득하고, 서쪽으론 푸르름과 낭만으로 넘실대는 지중해변이 줄지어 있다. 북쪽 갈릴리 호수로부터 신비의 바다 사해를 거쳐 남쪽 에일랏으로 이어지는 천혜의 휴양지인 이스라엘에는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