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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느림 Aug 10. 2020

혼자의 식탁

편의점 죽

무리한 다이어트를 한 것도 아니었고, 엄청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준비하던 공모전 마감일이 다가와서 잠을 하루에 2-3시간 정도 잔 것. 그렇게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일주일 동안 면역력이 떨어졌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마감 이틀 전부터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올라왔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열부터 체크했는데, 다행히 체온은 정상. 몸살 기운만 있었다. 처방된 약 외에는 잘 먹지 않지만, 주변에서 하도 성화여서 등 떠밀려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다. 역시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두통에 이어 복통이 찾아왔다.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공모전 탈고는 여차저차 끝냈는데, 긴장이 풀리자 본격적인 장염이 시작됐다. 명치와 아랫배 어딘가, 정확히 어딘지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딘가가 그냥 다 아팠던 것 같다. 콕콕 찌르듯이 아프다가 뭐만 먹었다 하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니, 먹은 게 없어도 때가 되면 화장실이 나를 불렀다. 그 누구처럼 통닭 한 마리로 장염 따위 한 번에 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상상은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고,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말았다. 친구들과 약속을 미루지 않고 다 소화해내려고 했지만, 정작 음식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 '이온음료를 먹어라.' 등 주변에서 온갖 처방이 쏟아졌지만, 그냥 뭘 먹는 것조차 귀찮아서 거의 30시간을 먹지 않고 내리 잤다.


아무리 쉬어도 증상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병원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장염이었다. 의사는 먹기 싫어도 누룽지나 죽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 다른 병원에서 하루정도 공복을 유지하라고 들었던 처방과 달라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나에겐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었다. 꽤 절실한 상태였다.


두통이 심해서 진통제를 처방받고, 이참에 영양 팍팍 때려 넣어 링거도 맞았다. 뭔가 즉각적으로 쨍! 한 효과는 느끼지 못했지만, 플라시보인지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이럴 때 유독 짠하다.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싶어도 집엔 나뿐이니까. SNS에 아픈 척 티를 잔뜩 내서 친구들이 물어오는 안부 메시지에 위로받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허기는 스스로 달래야만 한다. 아플수록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며 이성의 끈을 놓고 저녁 메뉴로 고민하던 추어탕이랑 감자탕, 순댓국은 무사히 참아냈다. 그걸 먹었더라면 과연 뒷감당을 할 수 있었을까? 병원에 다녀온 후 너무 배가 고파서 무심코 먹은 샌드위치 하나에 화장실을 세 번이나 갔으니... 어후... 나는 정말 말을 안 듣는다. 적당히 칭얼거리다가 편의점에서 2+1 행사 중인 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죽집을 찾아가기엔 이미 배가 너무 고팠으니.



죽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널찍한 그릇을 골라 정갈하게 담았다. 집에 있던 송이버섯을 얇게 썰어 마른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고명으로 올려 전복을 찾아보기 힘든 인스턴트 죽에 향을 더했다. 그렇게 차려놓고 보니 그럴싸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으면 아픈 걸 잠시 잊게 된다.


전분 투성이 인스턴트라며 무시했던 편의점 죽을 그렇게 두 번 먹었을 때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냉장고에 하나 남아있는 죽을 보며, 만약을 위해 덤으로 하나 더 챙겨 준 편의점의 인심이 새삼 고마웠다. 그게 비록 끼워 팔기 일지라도.


문득 누군가를 위해 죽을 끓인다는 건, 마음을 끓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 대한 걱정과, 어서 낫기를 바라는 간절함 섞인 마음을 끓여 만든 따뜻한 죽 한 그릇의 온기가 아픔을 가시게 하는 게 아닐까. 나의 간절함이 나를 낫게 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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