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이 봄이 아니다. 이렇게 더운 봄이라니. 성마른 여름이 나설자리 구분 않고 나낸다. 여름은 더 늦게 왔으면 한다. 사람에게 여름은 겪어내야 할 시련, 인내다. 가을의 보람된 수확을 위해, 추운 겨울을 대비 위해 결국 여름은 땀을 흘려내야 하는 만하는 시간이다.
며칠 전 둘째에게 읽어준 개미와 배짱이 이솝우화의 한 그림이 생각난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나르는 개미가 베짱이를 바라본다. 풀 위 어디엔가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배짱이말이다. 아마도 이솝아저씨가 21세기에 살았더라면 다른 개미와 베짱이를 쓰지않았을까?
이를테면 여름 내내 띵가띵가 놀던 베짱이가 겨울에도 풍족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있자 그걸 본 개미가 묻는다. "배짱이님. 여름 내내 놀고도 겨울에 먹을 양식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이 무언가요?" 도인처럼 베짱이가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말한다, "나도 한때는 자네처럼 열심히 일했었지.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둬야 한다네"... 등등. 뭐 이런 식의 얘기말이다.
"열심히"의 신화는 이미 깨진 듯하다. 노력이라는 것을 "노~~ 오~~ 오력"이라는 말로 빈정대는 걸 보면 말이다. 열심히의 신화가 견고했을 때는 여름내 노력하지 않은 베짱이는 풍족한 겨울을 스스로 기대조차 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의 신화가 깨져버린 지금, 여름 내내 논 베짱이도 성대한 겨울의 파티를 기대하는 세상이다. 노오~~ 력이 없이도 자유롭고 윤택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새로운 신화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신화도 기존의 열심히의 신화의 변주에 불과하다. 개미와 다르게 여름에 놀던 베짱이가 겨울에도 배부르고 풍족히 지내는 것은 베짱이가 개미보다 앞서 봄에 '미리' 노력을 해두었거나 긴 시간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식의 '색다른' 노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열심히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나 또한 세상 모든 것에는 그만한 대가가 존재한다 믿는다. 허나 거대한 개미의 노력의 결심은 어렵다. 지금의 내가 그 노력을 하려면 분명 가족들의 기다림, 희생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화살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이들의 시간인데 그걸 더 흘려보내 어쩌나 싶다. 붙잡고 함께 할 수 있을 때 같이 하고 싶다. 그래서 베짱이가 할법한 얄미운 작은 노력정도 해보려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 배짱이의 작은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인생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배짱이의 노력으로 몇 가지 일상의 큰 변화를 경험했는데 그중 하나가 첫째 아이의 영어다.
내가 대한민국의 학부모임에도 내 아이들을 위해 결심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다. 다시 오지 못할 아이의 유년시절을 학원의 콘크리트벽 안에서 사장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맞벌이랍시고 아이 하교시간 때문에 별 수 없이 학원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참 이율배반적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도 어린 아이의 자유시간을 영어학원에 헌납하는 것만은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겠다는 고집을 부려본다. 사실 비싼 학원 비용이 부담스러운 것이 솔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이와 집에서 시작한 영어다. 아직 영어를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하기 민망할 수준이지만 그래도 그간의 변화가 나 스스로는 놀랍다. 첫째가 영어책을 읽는 시간은 아침에 5~10분, 잠자기 전 5분이 다다. 하루 10~15분. 거기에 영어 영상물 노출은 하루 1시간 내외. 이 시간은 놀며 먹으며 보내는 시간이기에 별도 학습 시간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것을 1년 하고 반을 진행했다. 그러는 와중에 파닉스는 저절로 떼었고 ort 7단계 책은 스스로 혼자 음독, 묵독하며 읽을 수 있는 정도다. 영어 노출에 3시간씩 할애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는 데, 그런 위대한 개미의 노력 없이도 이 정도 성과를 이뤄냈으면 나름 만족스럽다. 나조차도 되지 않는 개미의 거대하고도 성실한 노력을 아이에게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배짱이의 얄미운 노력을 그저 매일 꾸준히 하도록 엄마로서 독려할 뿐이다.
이런 배짱이의 노력을 내 건강문제에도 적용해 본다. 암을 겪은 사람들은 몸에서 자연스레 발생되는 통증, 분비물, 약간의 불편함에도 "혹시... 또.."라는 불안을 갖게 된다. 하다 못해 몸에 새로 생긴 검은 점도 허투루 지나치지 못한다. 그것이 암의 지독한 후유증 중 하나다.
한 번은 소화가 몇 달째 잘 안돼서 "혹시... 또..."가 도지고 말았다. 한번 '혹시 또'가 일어서면 그날은 우울감과 짜증으로 황되는 날이다. 그때부터 작은 노력을 해봤다. 소화에 좋다는 마누카 꿀을 한 스푼 먹어보았다. 별 차이가 없었다. 하루 더 먹어보았다. 정도가 좀 나은 듯했다. 일주일을 먹어보았다. 조금 나아졌지만, '혹시 또'가 그 사이 또 도진다. 소화불량에 온몸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어 무작정 제자리 뛰기를 했다. 100번 정도 뛰니 갑자기 세상이 밝아 보인다. 막힌 속도 좀 뚫린듯하다. 그때부터 꿀 먹으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훨씬 나아졌다. '혹시 또'가 점점 사라진다. 땀을 내고 심박수를 올리는 운동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을 깨닫고 지금은 주 2~3회 줌바를 꾸준히 하고 있다. 줌바를 만난 지 3개월째, 지금은 속이 더부룩한 기분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나의 대장 상황도 그랬다.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 부작용인지 심한 변비가 와서 매일 토끼똥만 눈 지 몇 달째. '혹시 또' 녀석이 다시 나댄다. 찬찬히 바뀐 식습관, 생활습관을 되짚어본다. 야채, 물은 정말 많이 먹는데 영문을 모르겠다. 야채, 물도 더 많이 먹었다. 유산균도 먹어봤다. 그러나 여전히 토끼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친정엄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김치를 담가주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매일 몇 점 먹었다. 김치와 함께하는 식사다 보니 한 끼 식사량도 더 늘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화장실을 갔더니 유레카! 토끼가 아닌 사람다운 그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매일 김치를 조금이라도 먹고 매끼 식사량을 조금씩 늘렸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는 토끼가 아닌 사람임을 확인한다. '혹시 또' 녀석은 겸연쩍은 듯 쑥 숨어 들어가 버렸다. 배짱이의 작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녀석을 제압한 것이다.
우리가 노력 앞에 흔히들 저지르는 말실수가 있다.
"해봐도 안되던데?"다.
"해봐도 안되던데?"
그럼 더 많이 노력해 본다.
"해봐도 안되던데?"
그럼 더 길게 노력해 본다.
"해봐도 안되던데?"
그럼 더 자주 노력해 본다.
자신의 노력에 변주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이 모든 변주들을 거치지 않고 한곡을 마무리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해봐도 안되던데?"
그렇다면 다른 노력,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아무나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그 방법으로 노력을 해 보고 더 많이 해보고 또 더 길게 해보고 더 자주 노력을 해본 자 만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문제에 7,80%는 그저 "더 많이 해보고, 더 길게 해보고, 더 자주 해보고"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도 노력을 과대평가한다. 베짱이가 할 법한 노력만으로도 기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인생의 정점이 무언가를 이룬다는 성공에 있다고들 하지만 성공의 기쁨은 그 순간에 불과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며 살아가는 일상이다. 개미의 거대한 노력의 결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노력하고 살아가는 그 순간 그 자체가 곧 성공이다.
나는 이다지도 노력을 과대평가한다.
아니면 이 노력이라는 것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