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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핑거 Oct 22. 2022

공항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1000불을 받다.

평범한 얼굴의 현자에게서 배우는 사랑의 3가지 정의

프레이저 섬은 '하비베이'라는 작은 항구 도시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로트네스트 섬을 떠나 퍼스로 나와 비행기를 탔다. 하비베이로 가려면 브리즈번까지 4시간 정도 타고 가서 다시 환승해야 했다. 브리즈번에서 하비베이까지는 50분가량 걸렸다. 그 비행기 안에서 기막힌 인연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승무원들이 간식을 나눠주었다. 내 옆 안쪽 창가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간식을 전달해주다가 눈이 마주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헬렌이었다. 세련된 차림과 흰색에 가까운 금발의 단정한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나이는 스탠소프의 낸시 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호주 퍼스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브리즈번으로 가는 길에 나를 도와주었던 아주머니와 인상이 비슷했다. 그녀는 터키에서 만났던 장미와도 닮았었는데, 묘하게 헬렌과도 겹치는 모습이 있었다. '그녀도 이렇게 곱게 나이 들어가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헬렌은 퍼스에 있는 딸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동안 해왔던 내 여행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하니 감탄했다.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어둑해진 하비베이에 이르렀다. 작은 도시여서 그런지 공항도 작았다. 헬렌과 인사를 하고 짐을 찾아 입구 쪽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헬렌과 그녀의 남편 리처드를 만났다. 리처드가 헬렌을 픽업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이 내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미리 예약해둔 호스텔에 간다고 했더니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리처드가 내 배낭을 받아서 트렁크에 실었다.





차 안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섬에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주말에 하비베이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호스텔에 도착하자 리처드가 체크인하는 것도 도와주고 내 방 앞에까지 배낭도 들어다 주었다. 괜찮다고 해도 내가 방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걸 봐야 안심이 되겠다고 했다. 세상에는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매번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육지에 나올 때면 그들은 배 시간에 맞춰 항구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마트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는 것도 도와주더니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계산까지 해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줄게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내가 선물이라고 말해주었다. 집으로 데려가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도 제공해주고 맛있는 요리까지 해주었다.





그들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섬으로 돌아갔다. 80살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패션감각을 잃지 않은 헬렌은 인테리어 솜씨도 뛰어났다. 한쪽 벽면에는 크게 "L.O.V.E"라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리처드가 나에게 물었다.

"넌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니?”



나는 머뭇거렸다. 사랑이 그다지 잘 돼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남자들과 데이트는 했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즐거웠지만 가슴이 가득 채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전 어차피 여행 중이니까 어떤 진지한 만남을 가질 수가 없어서요."

내가 대답했다.



리처드가 잠깐 호흡을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은 단순히 남녀 사이의 로맨틱한 감정 그 이상이야.



그리스 철학적에서는 사랑을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고 했다.

“첫째로, 에로스. 남녀 사이의 사랑을 뜻하지. 넌 아마 이걸 생각하고 대답했을 테지? 둘째는, 필리아. 가족이나 친구와의 사랑을 뜻해. 마지막으로, 아가페는 인류와 자연, 세상을 향한 사랑을 의미해. 이렇게 범위가 넓은 사랑도 있지. 내가 보기엔 연화 넌 아가페적 사랑을 꽤 잘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평소 철학에는 문외한이었다. 그저 남녀 간의 애정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게 그의 가르침은 큰 울림을 주었다. 그랬다.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지구인으로 태어났다면 이 아름다운 지구를 최대한 많이 둘러보고 죽는 게 예의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여러 명의 천사 같은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밝고 살만한 곳이구나 라는 걸 점점 더 깨달아 가고 있었다.



리처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도 꼭 나처럼 처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고, 3년 간 배낭 하나를 메고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때는 휴대폰도, 구글 지도도 없던 시절이었지. 위기의 순간도 많았지만 매번 감사하게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3년 간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아무 탈 없이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어. 낯선 곳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지켜냈다는 사실이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지.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과 직감을 믿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고 말이야."



"맞아요. 저도 신기하게 가는 곳마다 꼭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요. 리처드와 헬렌도 그런 분들이죠."



그는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고 소개했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라는 개념보다 '세계'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세계시민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겸손해질 수 있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수록 느낀 건 사람은 99.5%는 똑같다는 거였어. 단지 0.5%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피부색이나 겉모습, 쓰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마다 규율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세상 어딜 가나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하고, 자식은 부모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지."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리처드의 말에 동의의 웃음이 터졌다. 스탠소프에서 피터와 낸시 방문했을 때였다. 하루는 그들의 딸도 방문했었다. 세상 걱정 하나 없을 것 같이 밝고 사랑스러운 낸시도 40살이 훌쩍 넘은 딸에게 걱정 섞인 말들을 했고, 그녀의 딸 트레이시는 그런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친구들끼리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이런 건 다 똑같아.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미국 맨해튼에 사는 사람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라는 거지."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이야. 큰 관점에서 보면 그런데, 또 개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그 차이가 무궁무진하지.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있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된 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모두에게 정답인 건 아니라는 거야. 책 [연금술사] 읽었다고 했지? 거기서 나오는 자아의 신화처럼 각자만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모든 젊은이들이 연화 너처럼 가슴속 열정을 따라 살았으면 좋겠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비스듬히 해를 등지고 앉아 있던 리처드의 얼굴이 보이지 앉았다. 순간, 반짝거리는 햇살 사이로 해맑게 웃고 있는 장미의 얼굴이 보였다. 가슴에서는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고, 낸시가 안아줄 때처럼 온몸에 온기가 느껴졌다.



프레이저 섬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비베이를 떠나기 전 헬렌과 리처드 집에서 며칠 지냈다. 나를 손녀처럼 대해주었다.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로 섬에서 틈틈이 그린 맥켄지 호수 그림을 선물했다. 그들도 나에게 줄 게 있다고 했다.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호주 달러로 1000불(약 한화 1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2주 후면 호주를 떠나 뉴질랜드에서 5주가량 여행하고, 남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남미에 가면 지금 보다 더 안전에 유의하고, 이 돈은 넣어뒀다가 필요할 때 써."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놀란 토끼 눈으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나중에 네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때 또 다른 젊은이들을 도와주렴."



이들도 ‘to pay it forward’를 말하고 있었다. 헬렌은 하나 더 준비한 게 있다고 했다. 손수 만든 작은 십자가 자수였다. "God is always with you.(하나님은 항상 너와 함께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 다웠다. "늘 지니고 다니면 이게 널 지켜줄 거야."라는 말과 함께 내 손에 쥐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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