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연화
장미는 모니터 앞에 앉아, 텅 빈 스크린 위에 이렇게 써 내려갔다.
매일 아침 6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이 야속했다. 얼른 지옥 같은 회사로 돌아가라고 닦달하는 것 같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검은 안개가 코브라처럼 몸을 휘감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놈을 '암흑'이라고 이름 지었다. 처음엔 작은 먼지였던 암흑이 근심을 먹고 점점 자라, 이젠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일지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어려운 취업을 드디어 해냈다는 안도감과 새롭게 열린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랬던 마음이 불
과 몇 개월 만에, 출근할 바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으로 까지 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미는 며칠 전부터 계속 한 여인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회사 생활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흐릿한 형상만 보였을 뿐인데, 꿈은 매번 더 생생해지더니 사무실 풍경, 팀원들과의 관계, 그 속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까지 고스란히 장미에게 전해졌다. 직장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장미에게는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고 매일 밤 스토리가 이어지기까지 하니,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보통은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신기하게도 이 꿈은 깨고 나서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오히려 비몽사몽 결에 꿈속 이야기는 살이 덧붙여지면서 어딘가 진짜 살아있는 누군가의 인생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오늘 아침 꿈에서 막 깨어날 때쯤, 그녀의 이름이 ‘홍연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미는 이 꿈이 다음 작품을 위해 신이 주시는 영감이라고 생각했다.
6년 전, 장미가 스무 살이 되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세계여행 준비였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까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학교 성적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확고한 결심은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 1 여름 방학 때 우연히 [바람의 딸, 한비야]라는 여행 에세이를 읽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직장인으로 잘 나가던 저자는 돌연 사표를 내고, 배낭하나 메고 7년 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런 삶도 있다니’. 그 사건은 장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 후로 그녀가 더 많은 책들을 읽어갈수록, 저 너머에는 얼마나 다양한 세상이 있을지 궁금해져만 갔다. 그렇게 장미의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고해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년 동안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략 1천만 원을 모아서 배낭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여행 준비 과정부터 블로그에 꾸준히 기록해 나갔다. 방문자수가 증가하는 만큼 광고 수익이 생겨 여행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4년 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발리의 조그만 마을에 정착했다. 한가로운 삶 가운데, 여행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펴냈더니,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은 잘 팔렸고, 블로그도 일주일에 몇 시간만 투자해 관리해 주면 어지간한 대기업을 다니는 또래들보다 잘 벌었다.
나머지 시간은 주로 독서와 사색을 즐겼고, 특히 그녀를 공주처럼 아껴주는 마이클과 둘 만의 울창한 숲 속 아지트에서 자연의 숨결을 느끼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외에도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여러 가지 사교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완벽했다. 좋아하는 여행을 하면서 행복했고, 더불어 경제적 성공도 따라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에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었다. 이럴 때 마침 꿈속의 여인 ‘홍연화’가 그녀의 삶으로 찾아온 것이다. 장미는 다시 한번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매일 아침 정확히 6시 30분에 알람이 울렸다. 연화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허둥지둥 회사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 벌써 회사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사이 아주 멋진 꿈을 꾸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를 보며 해변을 걷고 있었는데, 한 여인과 마주쳤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느낌이 아주 따뜻하고 포근했다. 어느새 꿈속 장면이 전환되어, 잘 가꿔진 정원 중앙에 놓인 야외테이블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고, 뒤로는 나무가 드리워져 그늘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집인 것 같았다.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행복했던 것만큼은 연화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연화는 자신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차 안을 둘러보았다. 맨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빽빽하게 앉아 있는 뒤통수들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수용소에 끌려가는 포로들처럼 보였다. 며칠 째 계속되는 가슴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이 가슴 중앙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장미는 암흑이 흩어져 심장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이번에도 꿈에서 연화를 만났다. 어쩐 일인지, 꿈속 장면이 사무실이 아닌, 장미의 집이었다. 둘이서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났지만, 연화가 마지막에 했던 말과 그 눈빛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연화의 고통이 장미를 덮쳐오면서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날 이후, 구해달라고 하는 것만 같은 연화의 그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장미는 그때 그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지금쯤이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미치자, 그 꿈속의 여인이 또 다른 자신이 아닐까 하며 동정심 마저 느껴졌다. 장미는 이렇게 결심했다.
‘내 글에서 만큼은 그녀를 구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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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배낭 여행을 다녀온 이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