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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핑거 May 14. 2023

3화. 나답게 살고 싶다.

현실에 치여 잊고 살았던 꿈, 세계일주

회사 차원에서 신입 사원들을 대상으로 멘토링 제도를 실시했다. 나는 인사팀장인, 왕 부장과 멘티, 멘토로 짝지어졌다. 왕 부장은 회사에서 유일한 여성 부장이자, 여성 팀장이었다. 그 혹독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자였다. 여사원들은 대부분 육아휴직을 하고 돌아오면 승진도 밀리고, 결국엔 그만두게 되어, 차장인 경우도 드물었다. 여성 부장은 왕 부장이 유일했다. 


하루는 왕 부장이 나를 사내 식당으로 불러냈다. 왕 부장이 가져온 커피와 책 한 권을 내밀며 말했다. “멘토로서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화 씨에게 어떤 꿈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좋은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골라 봤어요.”


왕 부장의 표정과 말투에서 다가가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도쿄에 있는 세계적인 금융회사에서 법무심의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한 한국 여성의 성공 스토리였다. 책이라면 1년에 한 권을 읽을까 말까 했던 나였지만, 이때부터 독서의 맛을 알게 되어 푹 빠지게 되었다.


독서는 검은 안개가 자욱한 직장 생활에서 한줄기 빛과 같았다. 책의 저자들이 나를 위로해 주고 가슴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모든 저자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해져라. 용기를 가져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10대 후반에는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수능에 매달렸고, 20대 초중반에는 남들이 인정해 주는 곳에 취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20대 후반이 된 나에게 남은 미션은 뭐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비슷한 남자와 만나 결혼해서, 출산과 육아라는 미션까지 클리어하고 나면, 그다음엔? 다른 여자 선배들처럼 회사에 돌아오기 힘들지 않을까?’ 


그렇다고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남자 선배들도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어깨는 축 쳐진 채로, 걸어 다니는 집단 좀비들 같아 보였다. ‘결국엔 저렇게 살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고 취업한 걸까. 저게 내 미래일까?’  



모니터 스크린 너머로 암흑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타인의 기준대로 살아가다가는, 먼 훗날 인생을 돌아보면서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으려면 '나' 답게 살아야 했다. '나'다운 삶. 내가 주체가 되어 이끌어가는 삶 말이다.  


책은 마치 회전문처럼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거절과 핑계에도 익숙해졌고, 강 차장과 임 과장에게서 당돌하다는 뒷말까지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 해가 흘러가면서 성냥갑 같던 나의 세상이 조금씩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버스나 기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휴가와 연차를 모으면 10일 정도 쉴 수 있었다. 휴가지로는 예전부터 그냥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었던 터키로 정했다.


3월부터 비행기 표도 끊어두었고, 일찌감치 카메라도 장만해 두었다. 여행할 때 들고 다니기 편하게 가벼운 걸로 준비했다. 지중해에서 입을 샤랄라 한 원피스도 미리 사두었다. 터키 여행책도 몇 권 사서 틈틈이 읽었다. 왕복 비행시간을 빼면, 터키를 즐길 수 있는 건 8일 남짓이었다.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짜야했다. 이스타불의 유명한 관광지들도 둘러보고, 카파도키아에 가서 열기구를 타는 것도 해야 할 목록에 넣었다. 꼭 먹어봐야 할 음식들도 체크했다. 더 깊이 있는 여행을 위해서 터키 관련 역사책도 구매했는데, 10페이지 정도 읽고는 책장 한 구석 전시용 책이 되어버렸다. 


손꼽아 기다리던 8월이 되어, 터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회사를 잠시 떠난다는 것 자체가 숨 통을 트이게 하는 것 같았다. 12시간을 날아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찾고 밖으로 나갔다. 터키인처럼 보이는 두리두리한 얼굴의 청년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라이트 게스트 하우스, 홍연화 / 그린 호스텔, 김철민 / 탁심 스마일 호텔, 장진영" 


한국에서 미리 공항 픽업 서비스도 신청해 두었던 터였다. 혼자 하는 여행은 처음이라 숙소 선택에 신중을 가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행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다고 알려져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이곳은 여행 책에서도 추천하고 있었고, 한국인 사장이 운영한다고 해서 조금 더 안심이 되었다. 


청년을 따라가 봉고차에 짐을 실었다. 차에는 먼저 도착한 유럽인들로 보이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출발 후, 한 시간을 달려 도심 근처에 들어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차 안의 분위기는 들뜨기 시작했다. 한 명씩 각자의 숙소에 내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차에서 내리자 하얀색 2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왜 라이트 게스트 하우스 인지 알 것 같았다. 햇살 때문인지 당시 들뜬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새하얀 건물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그때 활짝 열려있는 입구로 흰색 토끼 한 마리가 껑충하고 뛰어 들어갔다. ‘웬 토끼가 여기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문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고등학교 1학년 때 느꼈던 강렬한 두근거림이 다시 느껴졌다. 


무더운 여름, 나에게도 꿈이 찾아왔었다. 책 [바람의 딸 한비야]. 세계여행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녀. 그때 책에서 본 그녀의 삶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주변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비슷한 삶의 옵션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가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그러다 시집가서 애 낳고 살겠지.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거라 여겼던 나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 그녀. 수능을 위한 공부 기계처럼 느껴졌던 일상 속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말대로, 그 한 권의 책은 나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 주는 도끼였다.


그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죽기 전에 세계 일주! 언젠가는 꼭! 반드시! 아자 아자!" 그런 낭만은 잠시였다. 아름다운 꿈은 현실에 치여 서서히 잊혀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방금 그 토끼를 안아 올리고 있는 앳된 얼굴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겼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뮬란이 생각났다. 딱 붙는 탱크톱과 헐렁한 하렘팬츠 차림에, 팔에는 다양한 문양의 타투와 여러 개의 구슬 팔찌가 멋을 더하고 있었다. 





잠시 한 눈을 팔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희 숙소에서 키우는 토끼예요. 처음 오시는 분들이 다들 웬 토끼가 있냐며 신기하게 쳐다보시곤 하죠. 아참. 성함이 홍연화 씨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숙소 사장이었다. 생각보다는 꽤 젊었다. 30대 중후반쯤 돼보였다. 다부진 체격에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코에서 턱과 구레나룻까지 이어진 까만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해적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안내받은 방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라운지를 지나는데, 테이블 주위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 무리에 같이 있던 사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연화 씨, 잠깐 여기 와서 앉았다 가세요." 그러자 모두가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그 뮬란을 닮은 소녀가 이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있던 팔찌가 창가 너머로 들어온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리 중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또래처럼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저희는 여기 장기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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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배낭 여행을 다녀온 이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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