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살면서 의무로서 행하고 있는 활동 중 하나가 달리기다. 언제부터 꾸준히 달려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달리기가 꾸준한 활동이 된 동기나 그럴싸한 이유(건강을 생각해서라든지)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달리는 과정 자체가 좋냐고 하면 오히려 아니다. 달리기는 고통스럽다. 왜 달리기를 끊지 못하는 것인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다 보면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계속 달려도 되는지 마음 한구석이 미심쩍을 때가 있는데 어차피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미심쩍은 것들 투성이라 ‘뭐 괜찮지 않나.’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달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상태에 가깝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오히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달린다. 누구나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초조한 순간들이 불쑥 찾아오곤 한다. 나도 그렇다. 그럴 때마다 달린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감정 같은 문제를 다룸에 있어 효과적이다. 사실 감정을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는 시점에서 이미 달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예전부터 유지해 온 지론이다. 실제로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현상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인데, 결국 선행되어야 할 일은 인식을 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만드는 것. 그래서 달리기 시작한다. 열심히 달리다 보면 이런 공허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오려 할 때마다 가쁜 숨과 함께 몸이 가차없이 그것들을 떨쳐 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달리다 보면 지면과 달리는 나, 둘의 관계만 남는다. 계속 반복되는 작용 반작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순수한 몸짓만이 남아있다.
규칙적으로 심장이 뛴다. 그런 상태가 찾아오면 솔직히 기분이 좋다. 어쩌면 이 맛에 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마저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면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된다. 풍경은 이동하면서 멈춰 있다. 만물이 그저 ‘있다.‘라는 하나의 상태 속에 있고 그것을 온전히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달리기는 간단하면서도 근사한 운동이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나와 물러나는 지면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계(system)가 성립한다. 세계와 하나의 명확한 계를 이루고 싶어서 꾸준히 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를 통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도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역시 달리기 하면 어떤 음악을 듣는지, 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나는 달릴 때 리듬이 명확하고 규칙적인 곡들을 선호한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단한 리듬을 타고 전개되는 곡들을 주로 듣고 있다. 장르는 상관없이 요즘은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내가 팔로우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놓은 믹스테이프를 주로 듣고 있는데 달리기에 적합한 음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사의 비중이 큰 곡들은 듣는 내내 언어라는 형태를 갖춰 관념이 내 머릿속에 침투하기 시작하고(그래서 외국 음악을 많이 듣는다) 또 가사가 없다 해도 음들이 이어지며 만들어내는 서사가 강한 곡들은 몸의 규칙과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을 깨 버리기 때문에 이 점이 또 선곡을 힘들게 만든다.
그래도 달리기에 적합한 음악들이나 믹스테이프가 전무하지는 않다. 달릴 때마다 달리기에 적합한 세트리스트를 만들어 준 아티스트들에게 신세를 진다는 마음으로 뛰고 있다. 그들을 장르와 상관없이 ‘비트 메이커’라고 부르고 싶다. 견고한 리듬 속에서 쿵, 쿵, 쿵, 쿵하고 박을 정직하게 세게끔 만들어 주는 음악들을 들으며 달린다. 꾸밈이 없는 박들이 유지되는 동안 나도 그 박에 맞춰 몸의 단순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음악의 리듬과 심장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동시에 느끼며 몸을 서서히 동기화시키는 것이 내가 거의 매일 행하고 있는 달리기라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몸을 동기화시킴과 동시에 규칙적인 달리기의 리듬을 유지하는 데에는 낮보다는 밤이 좋다. 밤이 좋은 이유는 일단 어둡고 낮에 비해 소리가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에는 진동도 적다. 차가 도로 위를 다니지 않게 된 야심한 밤 시간대에 거대한 트랙을 달리는 일은 계절에 상관없이 근사하다. 지금도 사는 곳 옆에 대학교가 있어서 가끔 부지 내 트랙에도 신세를 지고 있다. 트랙이 좀 작다는 것이 흠이지만 있음에 감사해야겠지. 평지란 러너에게 굉장히 소중한 법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보통은 비트메이커와 함께 달리지만 가끔 이어폰을 빼놓기도 한다. 달리는 것이 순수하게 즐거워질 때는 가끔 빼놓기도 한다. 달리기에 온전히 집중할 때, 순수하게 유지되는 달리기 속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독립적인 리듬이 있다. 어쩌면 결국에는 그 리듬을 느끼기 위해 음악의 힘을 빌려서라도 달리기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완결적인 리듬이랄까, 달리고 있는 상태 말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내일도 달리고 있을 것 같다는 사실. 그저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쿵, 쿵, 쿵, 쿵 소리를 내며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