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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효 Jul 16. 2023

비 오는 날에는 2

중경삼림

 음악을 다 듣고 나면 주방으로 가 캔으로 된 화이트 와인과 주전부리를 준비한다. 거실 소파에 기대 TV를 켜고 영화 ‘중경삼림’을 재생한다.


 한번 본 영화나 책은 다시 보지 않는 편인데 여러 번 본 영화가 딱 세편 있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물랑루즈’와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Her’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다.


 이 세편은 모두 영상미가 뛰어나고 OST가 좋아서 여러 번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장마철에 ‘중경삼림’을 보는 이유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비 오는 여름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연인과 이별한 후 무척 힘들어했다. 출근해서도 슬픔을 참지 못해 화장실 칸에 들어가 울고는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 채로 폐인처럼 지내다가 8월이 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온 덕에 평소보다 조금 더 잠을 잘 수 있어서였는지 오랜만에 의욕이 생겨 영화를 보기로 했다. 수많은 영화 목록 중 ‘중경삼림’이 눈에 들어왔고 100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에 부담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양조위가 나오는 2부의 앞부분을 보면서 1부의 금성무 편이 영상미도 내용도 훨씬 좋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갈수록 엇갈렸지만 결국 만나게 되어 서로에 대한 호감을 확인하는 두 주인공과 양조위의 눈빛에 내 마음까지 두근거렸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았는데 알고 보니 1, 2부 모두 연인과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는 실연의 고통에 빠져있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주었다.


 ‘중경삼림’ 2부 마지막 부분에서는 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가게에서 1년 만에 재회하는데, 가게에서는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를 좋아했던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에게 이 노래를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묻는다. 남자주인공은 “익숙해져서요.”라고 답한다.


  ‘중경삼림’도 어느새 내 안에 스며들어 비 오는 여름이면 자꾸 이 영화를 보게 되나 보다.




 장맛비가 쏟아진다.


 구름 낀 날씨와 빗소리에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커튼을 걷고 살짝 창문 열자 습한 공기가 훅 들어온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비에 젖은 흙냄새를 음미한다. 비 오는 날의 추억이 담긴 루틴을 따라 장마를 즐길 준비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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