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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효 Aug 06. 2023

선(線) 1

물 공포증의 시작


 때는 1996년 여름, 내가 처음 죽을 뻔한 날. 그리고 물 공포증이 시작된 날.     

 

 초등학생 무렵 우리 집은 매년 여름 서해안 천리포로 휴가를 갔다. 외동인 내가 심심해할까 봐 부모님은 항상 친구분 가족이나 사촌들과 함께 휴가를 갔고, 그 해에는 6살 많은 사촌오빠와 엄마 친구 내외, 그 자녀인 오빠 둘이 휴가에 동행하였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아빠는 조수석 뒤에 꽂아둔 전국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고 휴가철 지독하게 밀리는 국도 위에서 파는 뻥튀기를 사 먹으며 뒷자리의 나와 사촌오빠는 한껏 들떠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를 불렀다.



     

 당시 만리포 해수욕장의 유명세에 밀려 사람도 없고 가게도 없이 한산했던 천리포. 그곳에 우리 가족이 방문하게 된 이유는 외할아버지의 동생, 즉 작은 외할아버지의 딸이자 나에게 종이모가 되는 분이 천리포 수목원을 관리하는 분과 결혼해 그곳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매해 여름 천리포 수목원 뒤편에 딸린 수목원 설립자의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커다란 콜리가 마당에서 뛰어놀고 화장실엔 건식 카펫이 깔려 있던 그 집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곳이었다.


 집 정원을 지나 갖가지 꽃과 나무를 구경하며 수목원을 통과하면 바로 눈앞에 천리포 해수욕장이 펼쳐졌고, 그곳은 프라이빗 비치처럼 사람이 없고 조용하여 해변가를 전세 낸 듯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모래찜질도 하고 조개와 게도 잡으며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캐릭터가 그려진 튜브를 가져왔다. 사촌오빠와 엄마 친구의 아들들은 나를 튜브 위에 앉힌 뒤 튜브에 묶인 끈을 끌며 점점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무서움 반, 스릴 반으로 튜브를 타던 중 갑자기 엄청나게 큰 파도가 밀려왔다. 오빠들은 튜브 끈을 놓은 채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았고 순간 ‘아 이대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바닷물과 모래가 닿아있는 해변에 누워있었다. 저편에서 오빠들이 모래를 갖고 노는 모습이 보이고 반대편엔 내가 탔던 튜브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창피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큰일이 아니었는데 혼자 놀라서 정신을 잃었구나 싶었다. 머쓱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노는 곳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이후 물 공포증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나는 검은 물, 짙은 남색 물, 파란 물이 들어있는 세 개의 우물 중 하나를 선택하여 빠져야만 하는 꿈, 깜깜하고 텅 빈 수영장 한가운데에 나 혼자만 남겨지는 꿈,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무언가 나를 잡아당기는 꿈,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같은 꿈을 수십 번 꾸었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정말 물에 빠졌던 것처럼 축축한 땀에 절어 깨어났고, 기분이 나빠지고 두려워져 점점 더 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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