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론 무용론과 유용론
토론은 사실을 다투는 것, 의견을 다투는 것, 정책을 다투는 것으로 나뉜다. 사실을 다투는 토론은 사실 관계가 확인되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면서 끝난다. 법원에서 원고와 피고가 벌이는 토론이 대표적이다. 의견을 다투는 토론은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토론이다. 가치관의 차이가 극명할수록 토론이 더욱 격렬해진다. 정책을 다투는 토론은 특정 정책의 실행 여부나 효용성을 대상으로 한다. 정치권에서 여당과 야당 사이의 토론이 대부분 정책 토론이다. 사실 세 가지 토론의 유형은 삼원색 벤다이어그램과 같다. 가치 토론이지만 정책 토론이나 사실 토론의 성격도 갖고 있거나, 정책 토론이지만 사실 토론이나 가치 토론의 성격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토론은 특정 상황에 국한된 토론으로 토론의 본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토론은 가치 토론이나 정책 토론이다. 사실보다는 의견의 대립이 더 자주 목격되는 토론 상황인 것이다. 물론 가치 토론이나 정책 토론에서도 사실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사실이 아닌 근거로 주장을 했다가는 쉽게 공격당한다.
사실은 틀릴 수 있지만 의견은 틀릴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이 제기한 사실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당신의 의견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의견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물론 의견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그 의견이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의견은 적어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틀린' 의견이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해 온 사고체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토론에서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다'라고 맹공격하는 사례를 흔히 본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토론이 토론이 아닌, '싸움'으로 변질된다.
만약 상대방의 의견이 틀린 의견이라면 토론의 목적은 상대방을 설득하여 상대방도 자신처럼 바른 의견을 갖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하지만 토론을 직접 해 봤거나 TV토론을 자주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토론의 목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가 만나서 서로 대립되는 정책에 대해 토론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마지막 장면은 어떤가? 둘 중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지지하는 경우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 둘이 쓴 미소를 띠며 어색한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토론이 끝났어도 상대방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토론이다.
그렇다면 토론은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토론을 통해 엄청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세상에는 붉은 장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하얀 장미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을 배우는 것이다. 또는 더 나아가 붉은 장비와 하얀 장미뿐만 아니라 검은 장미, 노란 장미, 초록 장미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운다. 이러한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마음은 한결 너그러워진다.
토론에 임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종종 정의로운 투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상대방은 정의롭지 못한 악한이 된다. 이것은 근대 사회를 획일화와 경직화로 이끌었던 '동일성의 신화'와 연결된다. 내가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상대방도 짜장면을 좋아해야 하고, 내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상대방도 축구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강요를 넘어선 폭력이다. 획일화되고 경직된 사회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전체주의로 귀결된 뼈아픈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토론을 할 기회가 있다면 상대방의 눈을 잘 들여다보라. 당신이 정의로운 만큼 상대방도 충분히 정의로우며 당신이 합리적인 만큼 상대방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게 된다. 이것 때문에 토론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