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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Aug 08. 2020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 나의 결단력이 처음으로 미워진 날

아버지와 나의 고향은 당시에는 시내에서 시골버스로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벽촌(僻村)이다. 아버지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태어나서 유년기에 해방을 맞이했고 10대에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를 거쳤으며 정보화 시대의 번잡스러움도 용케 견디셨다. 아버지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타고 나신 분이었다. 시골에서 47년을 농사꾼의 삶을 사셨던 아버지는 모종의 큰 결심 끝에 이농현상이 극심하던 시기를 틈타 단돈 60만 원을 들고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 전격 이주하셨다. 내가 12살 때였지만 그때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삿집 트럭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눈물로 우리를 전송했다. 우리들도 다른 이웃이 떠날 때 그랬듯이.


아버지의 '모종의 큰 결심'은 자녀 교육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시골 사람의 클리셰처럼 당신의 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원했다. 첫째 아들에게서 실패를 경험하자 아버지의 소망은 자연스럽게 둘째 아들, 즉, 나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소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램프 속의 지니'는 아니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도시로 나온 아버지는 이후 13년을 청소부와 공장 노동자의 삶을 사셨다. 아버지는 정말 성실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은 병적이었다. 청소부로 일하실 때는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이사로 청소비를 받지 못하자 버스로 열 정거장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가서 받아오실 정도였다. 단돈 5천 원 때문에. 아버지의 절약정신은 60만 원의 월세방에서 10년 만에 22평의 아파트 입성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아버지의 성격을 모두 이어받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철저한 절약정신만은 너무나도 싫었다. 모든 경제력을 쥐고 사신 아버지의 철저함 뒤에는 어머니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단돈 한 푼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으며 친구 한 명 자유롭게 만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간혹 반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의처증이 시작되었다. 


자식들이 삶의 기반을 마련한 60대에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반신 마비가 시작되었으며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몸이 부자연스러워질수록 의처증은 점점 심해졌다. 아버지의 억측과 독설로 괴로워하시던 어머니 때문에 내가 한밤중에 집으로 뛰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허리가 아팠던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아버지 간호를 힘들어했고 우리 5남매는 이제는 뭔가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점을 직감했다. 모두가 인정했지만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정이 애틋했던 누나들은 내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결단하고 추진해야 했다. 결국 내가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매미 소리가 밤낮으로 내 귀를  따갑게 했던 8월이었다.


억지로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되신 아버지의 소원은 매우 간단했다. 단지 집에 가고 싶다는 것. 나는 아침마다 집을 나와 저녁마다 집에 들어갔지만 아버지는 그 소박한 소원도 이루지 못하셨다. 그리고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세 달 후 기력이 점점 쇠해 지신 아버지는 결국 영원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아버지가 떠나시기 전, 처음으로 출간한 책을 들고 요양병원에 가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무표정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거기 니 이름도 있냐?"

하고 물으셨다. 당신이 당해왔던 무지(無知)와 무산(無産)의 서러움을 자식을 통해 풀어보고 싶으셨던 아버지는 책 표지의 내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무 말씀 없이 내 손을 꼭 쥐셨다. 아마도 두어 방울 눈물이 내 눈에 괴었던 것 같다. 곡기를 거의 끊으신 아버지는 사골 곰탕면을 먹고 싶다고 하셨고 나는 곰탕 사발면을 아버지께 먹여 드렸다. 그게 아버지가 이생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의 관 속에 내 책을 넣어 드렸다. 보공(補空)으로 들어간 내 책이 아버지의 지루한 저승길의 심심풀이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비록 반 까막눈이었지만 이승과 저승은 다를 것이므로 아마도 저승길에서는 누구보다 글을 잘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단호한 결단력과 힘찬 추진력으로 우리 가족을 이끌어 오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결단력으로 늙은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용서했으며 나 역시 아버지를 용서했다. 최근에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고향마을에 큰 비가 내렸다. 아버지가 누워 계신 산소가 온전할지 걱정스럽다. 큰 비가 지나가면 아버지의 산소에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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