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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Aug 09. 2020

나다움을 찾아준 섬마을 아이들

첫 직장을 섬마을로 발령받았다. 이제 사회생활을 힘차게 시작하는 젊음의 패기와 열정은 섬으로 들어가는 선창가에 도착하자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부서졌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아직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섬에 고등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는 점이 제일 놀라웠다. 이미자 님의 노래처럼 '섬마을 총각 선생님'이 된 것이다!


배로 20분을 가면 섬마을에 도착한다. 제법 큰 섬인데도 불구하고 인구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반농반어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마을과 마을을 잇는 좁은 길은 마을버스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하여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고등학교가 위치한 마을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사무소, 보건소, 농협 등이 밀집한 소위 다운타운이었다. 섬 생활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배 운항시간이다. 아침 7시에 첫 운항을 시작하여 한 시간에 한 번 왕복했으며 여름에는 오후 6시, 겨울에는 5시에 마지막 배가 출발했다. 여차하여 마지막 배를 놓치게 되면 섬에서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한다. 다행히 교직원을 위한 사택이 있어서 배를 놓쳐도 노숙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도 한 평 남짓한 단칸방을 배정받았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인사차 방문하여 처음 교무실에서 선배 선생님들을 만났다. 십여 명 밖에 안 되는 선생님들이 교무실 난로가에 옹기종기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선생님들이어서 그런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교사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했다. 집은 어딘지,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시시콜콜히 호구조사를 한 후에 총각이라서 위험할 수 있으니 사택 문은 잘 잠그고 자라는 등 나름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참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이 선생, 처음 교단에 서는 기분이 어때요?"


나는 순간 신규교사 연수 마지막 날 작성했던 '나의 다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다짐'을 쓸 때 떠올렸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또다시 떠올렸다. 내가 쓴 '나의 다짐'은 6학년 담임 선생님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머나먼 도시로 전학을 온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모든 것이 낯설었고 두려웠다. 우선 아이들이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이 달랐다. 아이들 옷은 화사했고 내 옷은 단색으로 낡았다. 아이들의 말투와 내 말투가 또 달랐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새소리처럼 명랑했고 내 목소리는 비 맞은 새앙쥐처럼 낮고 어두웠다. 또한 아이들 도시락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온 도시락이었고 내 도시락은 차갑게 식은 양은 도시락이었다. 처음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성질 있는 고양이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 모두 담임 선생님을 무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 구석에서 차가운 점심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담임 선생님이 내 자리로 오시더니 따뜻한 물을 따라 주셨다. 그때는 학교에 정수기도 없었고 당연히 온수도 구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물을 나에게 나눠 주신 것이다. 나도 놀랐고 아이들도 놀랐다. 담임 선생님은 4월이 되어 날이 따뜻해질 때까지 늘 나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 주셨다. 그리고 학년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선생님이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고우니까 앞으로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 장래희망이라는 방의 절반은 '선생님'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나는 교단에 서는 기분을 묻는 선배 선생님의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었다.

"긴장되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만난다는 게 더 즐겁고 설렙니다."

그러자 선배 선생님은 한 번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점점 알게 되겠지만 우리 아이들 보통 애들이 아닙니다. 첫인상이 만만하다 생각하면 선생님을 무척 괴롭힐 겁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선배 선생님은 나다움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엄격하게 대해야 내가 편할 것이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나'를 버리고 낯선 '나의 가면'을 쓰라고 한 것이다. 잠시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아무래도 아이들 경험이 많은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선생님은 구체적인 지침도 내려 주었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사생활을 절대 노출하지 말 것. 대답은 짧게 되도록 명사형으로 끝맺을 것. 웃지 말 것, 정 웃어야 한다면 일 초 정도만 미소 지을 것.


선배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이들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하루에 지각과 결과, 무단조퇴를 동시에 하는 학생이 네댓 명이나 되었다. 등교한 아이가 보이지 않아 수소문해 보니 인근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연락도 없이 등교하지 않아 집을 찾아갔더니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너 왜 학교 안 오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학교 가지 말고 고구마나 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수업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문학작품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학교 밖의 다른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선배 선생님의 조언대로 나는 사생활을 함구했으며 명사형으로 말을 맺었고 살짝 미소만 지으면서 아이들을 대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내가 무서워서라도 학교생활을 잘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대로고 나만 점점 지쳐갔다.


아이들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심하게 불편함을 느낄 때 우리 반의 한 여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여름방학이 며칠 남지 않은 무더운 날이었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교무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곱게 접은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평상시 학교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 때도 조용히 잘 듣는 모범적인 아이였다. 너무나 수줍어해서 얼굴을 마주치면 금세 복사꽃처럼 얼굴이 빨개지던 아이. 그런데 그 아이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편지에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때 집을 떠났고 지금은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 장애인인 오빠를 돌보고 있다는 이야기, 자신은 커서 간호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돌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이 쓰여 있었다. 마지막에는 우리들 때문에 선생님이 너무 힘드신 것 같다고 나이에 맞지 않은 위로의 말도 첨가되어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순간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떠올랐다. "너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고우니까 앞으로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라고 나에게 하신 말씀이 채찍처럼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래, 나는 지금까지 나답지 않게 살고 있었구나. 우리 반에 내 눈길이 필요한 아이가 스무 명이나 있었는데 말썽쟁이들 대여섯 명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이 소외받고 있었구나.'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나는 그 아이의 편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다. 다음날 등교한 아이에게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할머니를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의 할머니를 만나 두 시간 신세한탄을 듣고 마음이 먹먹해졌으며 퇴락한 집안 구석구석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집을 나오면서 나는 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너의 편지에 꼭 답장을 쓰겠노라고.


'선생님이 미칠 때쯤 여름방학을 하고 부모님이 미칠 때쯤 개학을 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떠돈다. 2학기 개학을 맞이해서 나는 근엄함과 엄격함의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그리고 본래의 나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학급 일기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글로 쓰도록 했다. 처음에 주저하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자 열성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복사꽃 여학생은 일주일에 한 통씩 나에게 편지를 주고 갔고 나도 일주일에 한 통씩 답장을 적어 보냈다. 나의 본모습을 찾으니까 우리 반 아이들이 비로소 다섯 명이 아니라 스물 다섯 명이라는 것이 보였다.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면 말썽쟁이들은 좀 달라졌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녀석들은 여전히 결석을 반복하고 수업 대신 낚시를 하러 가고 공부 대신 감자와 고구마를 캤다. 그래도 예전만큼 미워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나도 섬을 졸업했다. 가끔 연락을 하는 제자도 있고 연락이 끊긴 제자도 있지만 막상 찾아오는 제자는 없었다. 그런데 섬에서 나와 육지에 상륙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어떤 제자의 방문을 받았다. 찾아뵙겠다는 목소리에 나는 복사꽃 아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학교 안 오고 고구마를 캤던 말썽쟁이 녀석이 아닌가? 옛날 생각도 나고 참 반가워서 식사도 하고 차도 한 잔 마셨다.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한참 얘기하고 헤어지는 순간, 녀석이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처음에 우리 만났을 때 되게 무게 잡으셨죠? 그런데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오히려 귀엽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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