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따뜻한 전화 한 통, 힘을 주는 문자를 보내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참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연락도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비참하게도 후자가 전자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들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처 몰랐는데 내 휴대폰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빼곡히 저장되어 있었다. 그 번호들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다양한 연결 고리로 내 휴대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많은 이름들을 죽 훑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이름들은 즉각적으로 얼굴이 떠올랐다. 또 다른 이름들은 3~4초 생각하니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거의 60~70%의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는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나와 업무상의 관계로 맺어졌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단순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과의 만남은 순간적일 뿐이다.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위해서 내 휴대폰의 저장공간을 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휴대폰 연락처를 정리하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연락처를 정리하는 아래 그림과 같은 기준을 세웠다.
'나'를 기준으로 관계의 중요도를 나타낸 그림
세상에서 '나'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다. 부처님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다음으로 아내와 자식은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 휴대폰 메모리를 차지할 자격이 충분하다. 다음으로 나와 아내의 부모님과 형제자매이다. 나와 피로 맺어졌거나 아내와 피로 맺어졌으므로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어서 친한 친구나 선후배들이다. '친한' 친구이지 '모든' 친구가 아니다. 친하다는 것은 사귐에 진심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 친한 친구와 '그저 친구'가 확실히 구분된다. 친한 친구, 선후배는 남기고 '그저 친구'는 모두 지웠다. 다음으로 직장 사람들이다. 이게 좀 애매했다. 마음으로 만난 것이 아닌, 일로 만난 사이가 대부분이어서 모두 삭제해야 하지만 업무상 연락이 필요한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나의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최소한의 사람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웠다. 그리고 삭제를 모면한 직장 동료는 별도의 폴더를 만들어서 거기에 유폐시켰다. 내 삶으로 불쑥 끼어들지 못하도록. 마지막으로 기타 이해관계로 만난 사람들이다. 일초의 고민도 없이 모두 삭제했다. 이렇게 연락처를 정리해 보니 1,000명이 넘던 연락처가 단 1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마음을 써 주고 함께 고민하고 슬퍼하며 위로해 줄 사람 100명. 그것으로 족했다. 이렇게 정리를 한지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반년 동안 지워진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휴대폰을 정리한 다음에는 타인과의 만남이 겹칠 때 어떤 만남을 우선할지 나름대로의 기준을 마련했다. 중요도가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나'를 중심으로 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신경 쓰기로 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의 생일과 가족의 생일이 겹쳐지면 가족의 생일을 우선한다. 중요도가 서로 다른 일이 발생하면 중요도에 가중치를 주고 선택한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공교롭게도 형의 생일이다. 장례식과 생일 중에서 나는 장례식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므로 여기에 가중치를 두어 형의 생일보다 친구 부친의 장례식을 우선 챙긴다. 너무 계산적이고 옹졸하다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모두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와중에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어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인간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다 보면 정말 피곤한 일을 많이 겪게 된다.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사람이 청첩장을 보내면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멀리서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나는 그 사람이 친하다고 생각해서 사소한 부탁을 했는데 정색을 하고 냉정하게 대할 때는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니 폭넓은 인간관계는 나에게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중심적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정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아프면 가족들이 모두 걱정해 줬으며 내가 공부를 잘하면 가족들이 전부 기뻐해 줬다. 그러다가 점점 자라서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거역할 수 없는 명제와 대면하게 된다. 학교에서 사회화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명제의 힘은 막강해서 사회생활을 할 때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혼자 고립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로 작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관계의 망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타인'이 자리 잡게 된다. 나의 삶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일요일에 혼자 느긋하게 등산을 즐기고 싶은데 직장 상사 자녀의 결혼식에 할 수 없이 참석하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퇴근 후 책을 읽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회식이 잡혀 있다. 빠지게 되면 다음날 회식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료들의 잡담 속에서 나 혼자 떠밀려 난 느낌을 받는다. 폭넓은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중심이 되면 상관이 없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더 자주 접한다.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나'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항상 내가 가족의 중심이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되찾는 일이다. 시간이 날 때 한번 휴대폰의 연락처를 잘 들여다보시라. 그리고 이 사람이 과연 내 휴대폰에 둥지를 틀 만한 사람인지 고민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