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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Nov 23. 2020

관계의 비대칭성

- 나는 너를 연인으로 생각하는데 너는 나를 그저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띵똥! 카톡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카톡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와 커피 두 잔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친구가 보낸 선물이었다. 아래에는 짧은 메시지가 달려 있었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49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 나의 베스트 프렌드에게'

처음에는 놀라고 기뻤다. 친구에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로 받은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당혹스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그 친구가 어떻게 내 생일을 알았을까? 그렇지. 카톡에서는 친구로 맺어진 사람의 생일을 알려주니까 그렇게 알았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내 나이가 49살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내가 그 친구에게 나이를 얘기했었나?'

그런데 나는 그 친구에게 나이를 얘기해 준 기억이 없다. 물론 나도 그 친구의 나이를 모른다. 대충 나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라는 추측만 했을 뿐이다. 

그 친구는 황송하고도 미안하게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우리는 업무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이후 가끔 술 한 잔 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우리의 화제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뺀 다른 이야기였다. 직장 생활의 어려움, 재테크의 요령 등 사소한 이야기부터 정치, 경제와 같은 무거운 주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친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애완동물은 무엇을 키우는지, 아내와는 사이가 좋은지,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지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길다면 길 수도 있지만 '베스트 프렌드'가 되기에는 짧은 시간이 아닐까? 나의 사전에는 베스트 프렌드는 '적어도 학창 시절에 처음 만나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친구'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황송하고도 미안하게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대학교 입학해서 만난 친구다. 우리 둘은 대학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아웃사이더였다. 이러한 성격상의 공통점이 그 친구와 나를 친밀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늘 함께 밥을 먹었고 도서관에 같이 가서 공부했으며 서로의 고민도 나눴다. 이런 관계는 대학을 졸업해서도 이어져서 내 결혼식에 그 친구가 사회를 봐주고 자기의 차를 웨딩카로 장식해서 빌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만나서 자전거도 함께 탔다. 한 번은 제주도 자전거 일주 여행을 둘만 가기도 했다. 내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여행을 한 것은 그 친구와의 여행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이 무려 30년이다. 이 정도면 서로 베스트 프렌드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어느 날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어느 일요일 자전거를 탄 후 카페에 들렀는데 친구가 자신의 직장 동료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다. 이야기 내내 동료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정도 많고 배려심도 남다르다는 둥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많이 써 준다는 둥 동료에 대한 칭찬에는 애정이 듬뿍 들어 있었다. 작년 겨울에는 그 친구와 단둘이서 유럽여행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이없게도 나도 모르게 질투심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나는 너를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직장 동료를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하고는 제주도만 가고 그 동료와는 해외여행도 했구나.'

참 치졸하고도 옹졸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옅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학에서 쓰는 용어인데 서로 거래할 때 한쪽만이 특정 정보를 갖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마트에서 식용유를 샀다고 치자. 식용유를 잘 살펴보면 이 제품에 어떤 영양성분이 있는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했으며 어떤 첨가물이 들어있는지 매우 알기 어려운 용어로 빼곡히 적혀 있다. 그걸 다 이해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식용유가 필요하니 그냥 사는 것이다. 하지만 식용유를 만든 사람은 이런 정보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 생산자는 아는데 소비자는 잘 모르니 소비자가 훨씬 불리해지는 것이다. 생산자가 이를 악용할 소지도 충분하다. 몸에 별로 좋지 않은 성분을 첨가해도 소비자는 그 성분이 유해한지 아닌지 알지 못하므로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여친으로 생각하는데 너는 나를 남사친으로 생각하는구나!
(혹은, 나는 너를 여사친으로 생각하는데 너는 나를 남친으로 생각하는구나!)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인간관계에도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듯하다. 나는 친구에 대해 잘 아는데 친구는 나를 잘 모르는 상황. 이것을 '관계의 비대칭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관계의 비대칭성은 연애를 할 때 자주 발생한다. 한쪽만 열렬히 사랑하고 다른 쪽은 시큰둥한 슬프고도 애달픈 상황. 바로 짝사랑(혹은 외사랑)이 연애 상황에서의 '관계의 비대칭성'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고 있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는 경험은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슬프게 하기도 한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는 100미터 달리기와 같은 직선 운동이 아닌 리듬체조와 같은 곡선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향과 형태를 알 수 없는 요란스러운 리본의 움직임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의 운동이 인간의 심리를 닮았다고 생각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리본이 어떤 모양을 보여줄지, 고무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게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감정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역시 당연하다. 


관계의 비대칭성 때문에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친하다고 생각해서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털어놨는데 상대방은 듣기만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불쾌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좀 거리를 둬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런 불편한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 번 째는 소극적인 방법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어차피 비대칭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인간관계의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두 번 째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상대방이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나도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을 다 보여주면 나도 자신을 다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관계의 비대칭성이 완화되고 손해 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간관계는 햇살이 비치는 날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인간관계는 정말 오해와 갈등의 연속이다. 햇살이 비치는 날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상대방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해가 지면 어둠이 오는 것처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진다. 한 번만 시간을 내서 친한 친구를 떠올려 보길 바란다. 그 친구가 정말로 나의 베스트 프렌드인지, 그 친구는 나를 진정한 베스트 프렌드로 생각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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