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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Apr 02. 2021

ISTJ와 ENFP의 신혼여행기

ISTJ: 계획한 대로 움직인다 / ENFP: 움직이면서 계획한다

만남에서 연애까지가 완행열차라면 연애부터 결혼까지는 KTX였다. 연애가 공식화되자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원래 나의 ENFP 집안에서는 적어도 3년은 돈을 벌어주고 가기를 바랐지만,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우리 집에서도 동의했지만 연애하는 사람의 감정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법이다. 3년은 순식간에 6개월로 감가상각 되었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에누리 없이 적용되어 우리는 다음 해 2월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조촐한 상견례도 치렀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런데......


추석 전날에 일이 터졌다. 어차피 결혼을 약속했으니 추석 전날 시댁(이 될 집, 즉 우리 집)에 와서 송편을 함께 빚자는 거역하기 어려운 부탁을 예비 시어머니가 예비 며느리에게 통보한 것이다. 나의 ENFP는 순순히 명을 받들었다. 추석 전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송편 빚기가 시작되었다. 반죽을 떼서 얇게 편 후 송편 속을 넣고 잘 여미는 반복 작업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처음에 시어머니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송편을 만들어 가던 나의 ENFP의 안색이 두 시간이 지나자 점점 송편과 함께 들어가는 솔잎처럼 푸르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의 ENFP는 말을 잃었다. 무거운 정적이 계속되었지만 정적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송편을 다 빚고 어색한 인사를 하고 나의 ENFP는 우리 집을 나섰다. 맥주 한 잔 해야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와 그녀는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결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 집안 내력인데 대학 때에는 소주 한 잔에 기절한 전력도 있었다. 알코올에 대한 민감성이 얼마나 큰지 주사를 맞기 위해 알코올 소독을 할 때에도 소독 부위 전체가 붉게 물들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할 때에는 뭔가 거대한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는 증거다.


맥주를 딱 반잔 들이켜고 나의 ENFP는 불편한 심기를 폭풍처럼 쏟아냈다. 막 땅속에서 캐낸 돌처럼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그녀와 나 사이의 맥주잔을 쉴 새 없이 오갔다. 근 30분을 일방적으로 토로한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겨우 송편 빚자고 결혼을 하는 것이냐? 나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고 곱게 자란 몸이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하자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불평등한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야겠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사실 나는 좀 놀랐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남자 집에 와서 송편을 빚는 것이 뭐 그리 안될 일이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 알았는데 두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의 ENFP 집안은 당시로는 드물게 매우 평등한 가풍을 갖고 있었다. 모든 의사결정은 부모, 자식을 떠나서 모든 가족 간의 협의로 이루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고 또 대학에서 짱돌을 제법 던졌을 정도로 반골 기질이 충만한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들어도 송편을 빚는 순간 지금까지 지켜 온 집안의 분위기와 자신의 기질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리는 슬픈 감정을 경험했으리라.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30분을 쏟아내고 눈물까지 잠깐 비쳤을 때 나는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어째 어째 그녀를 설득하고 달래서 진정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날 터진 문제가 결국 결혼 후 15년 동안 우리 둘을 괴롭혔다. 최근에는 숱한 노력과 인내로 암초에서 잘 벗어났지만 이 문제가 결혼생활의 제일 큰 화두였음에는 틀림없다. 아마 기혼자 모두는 나와 같은 상황을 크게든 작게든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득 세상의 모든 기혼남들과 동지애적 연대감을 느낀다.


드디어 섬 주민들이 대거 참석하여 섬이 텅텅 비다시피 하고, 아이들이 오랜만에 도시 나들이한다고 어색한 정장을 입고 나타나고, 머리털 나고(실제로는 엄청난 대머리임) 처음으로 주례를 서 본다는 교장 선생님의 들뜬 주례 40분을 끝으로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사실 우리 둘 다 교장 선생님의 독재에 혁명을 일으키려고 작당했었기 때문에(ISTJ와 ENFP의 연애시대 참고) 애당초 주례를 부탁할 마음이 없었으나 둘 다 같은 학교 직원인데 교장 선생님한테 주례를 부탁하지 않으면 교장 선생님이 단단히 삐칠 것이고 그 불똥이 교직원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원로 선생님의 눈물 어린 부탁 때문에 할 수 없이 교장 선생님을 주례로 모시게 되었다. 주례 부탁하러 교장실에 갔을 때 참을 수 없는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던 교장 선생님의 해맑은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쨌으면 나이 육십이 되도록 주례 한 번 못 섰을까 생각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교장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한 일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날 예식이 우리 밖에 없었기에 교장 선생님이 40분이나 주례를 서는 바람에 나의 ENFP는 중간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래도 2월 학기 중에 신혼여행을 둘이나 떠나는 데도 흔쾌히 허락했으며 심지어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비에 보태라고 10만 원까지 봉투에 넣어 주셨다.


신혼여행은, 아니 모든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설레고 기쁜 법이다. 내가 가진 'J'는 여행 전에 철두철미한 계획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내의 'P'는 "사전 계획 따위는  x나 줘버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하면 먼저 오사카로 가서 료칸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전철을 타고 나라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서 또 다른 료칸에서 자고 마지막에는 교토로 이동하여 이틀을 묵고 돌아오자는 나의 장황한 계획에 나의 ENFP는 딱 한마디로 대답했다.

"알아서 하슈."

그렇게 나는 내가 알아서 비행기를 예약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 루트를 짰다. 역사과인 아내의 전공도 고려할 겸 '일본 속 우리 역사를 찾아서'라는 장대한 여행 목표를 설정하고 20kg짜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후 한 시간을 기다려 시내로 가는 공항 열차를 탔을 때, 그리고 좌석이 없어 또 한 시간을 서서 가야 했을 때, 드디어 우리는 우리 모습이 마치 실크로드를 횡단하여 서역으로 불경을 찾으러 갔던 삼장법사와 꽤나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의 진솔한 경험담에 기초를 두고 간곡히 말씀드리건대, 신혼여행을 배낭여행으로 계획하신다면 쌍수를 들고 말리고 싶다. 신혼여행은 이동 거리가 짧고 한 곳에만 머무르는 리조트로 가기를 권한다. 주는 밥 잘 챙겨 먹고 코끼리 한번 타 보라고 하면 타고 원숭이 먹이 줘 보라고 하면 주고, 저녁에는 한가롭게 해변에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보며 와인 한 잔 가볍게 하는 그런 여행, 가이드가 하라는 대로 하면 모든 게 편한 그런 휴양지 여행이 신혼여행으로는 적격이다. 그렇지 않고 호기를 부렸다가는 여행이 고행이 된다.


고행 같은 여행은 반드시 싸움을 동반한다. '서유기'를 보면 삼장법사도 손오공과 얼마나 많이 싸우던가?

"스님, 불경에 밥이 있소, 금이 있소? 책 쪼가리 하나 얻으려고 거기까지 미쳤다고 간단 말이오?"

"이 무식한 놈아. 부처님 말씀은 천 그릇의 밥보다도 배부르고 만 수레의 금보다도 값지다. 그걸 네놈이 어찌 알겠냐?"

기록에는 없지만 분명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했을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아서 여행 이틀 째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끙끙거리며 끌고 올라간 20kg의 캐리어가 오사카에서 나라로 가는 전철 안에서 팝콘 터지듯이 터져 버린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의 여행객을 바라보는 측은하면서도 모멸에 찬 눈빛을 하나 가득 받으며 우리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탈출한 팝콘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캐리어도 폭발하고 나의 ENFP도 폭발했다.

"그러게 송편 빚으라고 할 때부터 이 결혼 다시 생각했어야 했는데."


송편을 소환하면서부터 우리의 나무뿌리가 흔들렸다. 가지는 쳐 내도 다시 자라지만, 나무뿌리는 잘라내면 나무가 쓰러진다. 나의 ENFP는 가지가 아니라 나무뿌리를 잘라내는 말을 한 것이다. 순간 나의 'T'가 스스로 곁가지를 만들어 'F'로 변하는 울컥한 감정을 느꼈다. 모든 계획도 내가 세우고 예약도 다 내가 했는데 감사할 생각도 없이 결혼을 부정하는 말이나 하다니?

"그럼 앞으로 자기 계획대로 해 봐."

라고 쏘아붙였더니 다음날부터 나의 ENFP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숙소 빼고는 모든 여행 루트가 즉흥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고국에서 찾아놨던 여행지 정보, 맛집 리스트는 써먹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나의 ENFP는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밥 먹고 아무 절에나 들르고 아무 공원에나 들어갔다.

"어, 이 식당 문 색깔이 예쁘네. 여기서 밥 먹을까?"

"저 공원에 사람 많다. 뭔가 볼 만한 게 있는가 봐."

이런 식이었다. 나는 훈련소를 마치고 어느 부대로 배치받을지 모르고 끌려가는 신병처럼 영 불안했다. 그런 불안이 불만의 표정으로 드러났고 불만의 표정을 보는 나의 ENFP도 나의 불만을 불평했다. 불만과 불평이 뒤섞인 일주일 간의 신혼여행은 단맛이 다 빠진 와인처럼 쓰디쓰기만 했다. 그리고 귀국하는 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사건이 발생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택시를 이용했다. 재일교포가 사장이라는 최고의 친절택시 MK택시였다. 택시가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택시비를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꺼낸 상태였다. 그런데 뭐에 씌웠는지 지갑 안에서 돈을 꺼낸 것이 아니라 주머니를 뒤져 택시비를 계산하고 지갑은 뒷자리에 놓고 내려 버렸다. 전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전철이 5분 안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난 후 나는 비로소 지갑을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갑 안에는 엔화가 모두 들어 있었고 엔화는 일본 공항에서 공항이용료를 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태어나서 물건을 거의 잃어버려 본 적이 없는 나는 순간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잽싸게 전철 주차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랬더니 글쎄 그곳에는 내가 타고 온 택시와 모양과 색깔이 똑같은 300여 대의 택시가 질서 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정차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어떻게 찾겠나? 결국 지갑을 포기하고 전철을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화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으니까 이걸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공항에서 한화를 엔화로 바꿀 수 없으며 공항이용료는 신용카드로도 지불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불길한 마음은 불안을 넘어서서 공포로 바뀌었다. 공항이용료를 내지 않으면 출국이 되지 않는 것이다!(이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니 간사이 공항을 이용하는 분은 큰 걱정을 하지 않길 바란다.) 출발 시간은 다가오고 방법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멀리서 다가왔다. 허둥대는 젊은 남녀를 보고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다가와서 아주 친숙하게도,

"뭐, 문제 있습니까?"

한국말로 물어 온 것이다. 우리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그날 난생처음 알았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그분은 주머니 속에서 백 장쯤 되는 공항이용료 티켓을 꺼내더니 두 장을 선뜻 내어 주었다. 내가 한화를 드렸더니 극구 받지 않으면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죠."

하며 홀연히 오던 길을 되돌아 단체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 쪽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단체관광객 가이드일 텐데 내가 아직까지 여행 가이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신사 덕분이다.


이제 공포는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깃들었다. 검색대만 통과하면 '신혼고행'의 나라를 드디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검색대를 통과하는 순간 또 일이 생겼다. 나의 ENFP는 무사히 통과했는데 내가 통과할 때는 경보음이 울린 것이다. 허리띠를 풀라고 해서 풀었는데도 또 경보음이 울렸다.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모두 꺼냈는데도 또 경보음이 울렸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경보음은 계속 울리고 검색대의 여직원은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고 금속탐지기로 내 몸 곳곳을 훑었다. 이상하게도 허리 아랫부분에서 경보음이 계속 울리니 여직원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나는 연신 시계를 가리키며 직원을 다그쳤다. 여직원은 할 수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정신없이 비행기로 뛰어들어가니 우리 때문에 비행기는 5분 연착 중이었고 우리가 등장하자 승객들이 모두 환영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결혼 후 우리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일본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한 번 다녀온 곳은 다시 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나 나의 ENFP는 아직까지 오사카, 교토, 나라는 다시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신혼고행의 추억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지갑은 찾았냐구? 못 찾았다. 귀국한 후 마지막으로 묵었던 호텔에 짧은 영어로 혹시 지갑이 들어온 게 있느냐고 물었지만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천하의 MK택시에 실망을 한 순간이었다.

금속탐지기 경보음의 원인은 찾았냐구? 그것은 찾았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은 순간 내 언더웨어의 상단에 초승달 모양의 쇳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석이었다. 결혼할 때 사위 속옷은 장모가 마련하는 법이라면서 속옷을 여러 벌 사 주셨는데 그중에 자석이 붙어 있는 속옷이 있었던 것이다. 손자 보기를 간절히 바랐던 장모님의 마음이 초승달 자석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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