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TRA와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하고, 엔터테인먼트 사에서 도망치듯 나온 종착지는 5인 미만 사업장 스타트업 H이었습니다. ‘왜 갑자기 스타트업이냐?’라고 질문주실 수도 있는데, 당시 저는 스타트업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회사 분야가 제가 평소에 관심 있던 영화 쪽이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함께 키워낸 기업을 나중에 대표님이 엑싯하게 되면, 받아둔 스톡옵션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오만하고 겁 없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한 가지 깨달았는데, 저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도 있었지만, 스타트업에 근무하면서 영화를 단 3편가량 본 것 같습니다.
H 스타트업 입사를 위한 서류 전형과 면접 전형은 쉽게 마무리되었고, 출퇴근을 위해 부천으로 이사 갔습니다. 최저시급을 받아가며, 10평이 채 되지 않는 공용사무실에서 대표님, 동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총멤버는 5명이었는데요, 나름 재미는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매출을 발생시켜 기업의 순이익을 높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해야 정부 지원금을 받아 기업의 생명선을 늘릴 수 있을지 더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주된 업무는 두 가지였습니다. 1) 정부 지원금을 위한 사업 계획서 작성, 2) 회사에서 운영 중인 APP DAU(Daily Active User) 증대. 사업 계획서를 20~30편 작성하고, APP의 DAU가 40명에서 400명가량까지 증대했을 때 느낀 점은, 앞으로 창업을 하겠다는 친구나 지인이 있다면 뜯어말려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본 스타트업의 멋있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옆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스타트업의 현실은 말 그대로 ‘알고도 타는 난파선’과 같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6개월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참가한 ‘디지털 노마드 in 제주'에서의 2주가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퇴사를 하고, 신중하게 고른 기업 3곳에 입사 서류를 송부했습니다. 며칠 후 가장 가고 싶었던 글로벌 기업 T에서 ‘Global Marketing Associate’ 직무 면접 제의가 왔고, 실무진 두 분과 함께 한 시간가량 면접을 봤습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는데, 다행히 좋게 봐주셔서 1차 면접에 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2차 면접만 남았습니다. 당시 1차 면접 합격 발표에서 2차 면접까지의 템포가 빠르게 진행되었기에, ‘가성비' 좋은 면접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리드장님과의 면접에서 나를 가장 단기간에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고, 다행히 답을 빠르게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KOTRA 입사 당시 활용한 ‘+기획안' 전략을 다시 한번 해보기로 다짐했죠. 분명 이번에도 통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차 면접 보기 전까지의 일정 절반을 ‘마케팅 기획안' 작성하는 것으로 소비하게 됩니다. 준비된 A4 용지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드리는 상상을 하면서요.
2차 면접 당일, 마케팅 기획안 출력본을 들고 다시 한번 회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자기소개, 지원 동기, 경험 질문… 압박 면접이 진행되었고, 30분 간의 티키타카가 진행되는 도중 손꼽아 기다리던 질문이 드디어 꽂혔습니다. ‘마케팅 팀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저희 회사를 소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곰곰이 해보았는데요,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좋아 드릴 것 같아 자료로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보여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약 20분 동안은 이 마케팅 계획안에 대해 설명드리고,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다음은 파트장님께서 실제로 질문 주신 내용입니다.
- 약 10페이지가 되는 것 같은데, 기획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요.
- 만약 실제 업무라고 가정하고, OO님이 전달해 주신 이 기획안을 제가 거절을 했어요. 그렇다면 거절한 이유가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 제가 거절할 만한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약 3가지 정도 이유를 말씀 주셨습니다.) 이유를 들은 뭉구박사님의 입장은 어떠하신가요?
- 만약 지금과 같이 기획안을 작성해서 제출하셨는데, 제가 거절을 한다면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면접이 끝나고 약 일주일 뒤, 최종 합격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과 +기획안 전략이 다시 한번 최종 합격으로 이끌게 된 셈이죠. 회사 입사 후, 파트장님과 식사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빠르게 마련됐는데요. 식사를 하면서 ‘저를 왜 뽑으셨나요?’라는 다소 난감할 수 있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파트장님은 약 5초간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대답하셨습니다.
“마케팅 계획서를 보여준 순간, 얘는 무엇이든 잘하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참고로, 뭉구박사님은 저희가 생각했던 직무 경력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잠재 능력을 보고 뽑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해당 채용 공고는 본래 정규직 대상자였는데, 저는 정규직 전환형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간의 인턴 과정을 거친 뒤, 대표님 면접 후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이죠. 결론적으로는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약 3개월 만에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열심히 준비해서 취업도 했고 정규직 전환도 되었으니 이 회사만큼은 오래 다녔겠지?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T 회사는 약 8개월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제목에 담긴 대기업으로 마지막 이직을 하게 됩니다. 당시 T 회사는 시리즈 D 규모를 진행 중이었으며, 현재는 유니콘 기업이 되었을 만큼 잠재 가치가 높은 회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떠나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저체중을 계기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이후, KOTRA 입사를 준비하며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이끄는 힘을 알게 됩니다.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엔터테인먼트에서 퇴사하며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지금, 1년 사이에 이루어진 2번의 이직을 통해, 하면 된다는 생각과 실천은 이제 제 인생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오래전 무역학과 출신들을 신규로 공개 채용하였을 때의 일이다. 물론 일류대 무역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자들이 뽑혔다. 그리고 얼마 후 내게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던 어느 지방대 출신 학생이 보낸 것이었다. 열어보니 두껍고 낡은 노트 몇 권이 들어 있었다. 그 노트들에는 그 학생이 학창 시절에 수년 동안 무역 회사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얻어 낸 무역 실례들과 각종 무역 서류들의 형태와 작성 기법, 그리고 실무적 주의사항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동봉된 편지에는 ‘저는 정말 자신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과 900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 사본이 들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이미 채용한 녀석들이 미워지기 시작했지만 어쩌랴. 결국 그 학생을 내가 알던 외국계 기업에 강력히 추천하였고 그는 당연히 채용되었는데 불과 7~8년 만에 부장이 되었다(그 뒤 회사를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
- 세이노, <세이노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