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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 Jan 26. 2021

파리의 우범지대, 생드니에 산다는 것

03. 비 오는 날 이사를 하면 잘 산대

잠을 설쳤다. 

겨울이어서 안 그래도 늦은 아침까지 날이 어두운데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두어 시간을 이마에 팔을 얹고 생각을 했다. 옆에는 하루 동안 집을 내어준 친구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지난 11월부터 줄곳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졸업 직후에 기숙사 생활을 관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프랑스는 전국적인 이동제 한령이 생겨났고, 대학들이 수업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간 룸메이트를 둔 친구가 자기네 집에 와서 지내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동제 한령에 기숙사 방에서 혼자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었던 내게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그 친구네 집에 며칠 살다가 같은 극단 친구들과 프랑스 시골로 레지던스를 떠났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고, 20분 걸으면 브르타뉴의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었던 레지던스에서의 일주일, 그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친구네 집에서 2주 정도... 그러다 보니 11월이 훌쩍 지나갔다. 12월에는 급하게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 친구가 미처 방을 빼지 못한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평소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던 파리 북동쪽 19구의 뷰트 쇼몽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아파트였고, 아르헨티나인 친구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보름 정도 같이 지냈기 때문에 스페인어도 조금 배울 수 있었던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지금 생드니 집을 구하게 되었고, 19구 아파트 계약일과 생드니 집으로의 입주일에 하루 비는 날짜가 있어서 이사 가기 전날 이 친구네 집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2달 동안 지낸 집이 네 곳이라니. 과연 떠돌이가 맞다. 사주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내 사주에는 역마살이 끼어있을게 분명하다. 


역마살 같은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이사 갈 집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생드니로 가는 13호선은 항상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종점으로 갈수록 아프리카계 프랑스인 혹은 아랍계 프랑스인들로 지하철은 가득 찬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다. 


이사 갈 집에 도착하니 이 집에 살고 있던 집주인은 마지막 짐을 트럭에 싣고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새로운 집으로 떠났고, 우리는 남아 부동산 직원과 집의 상태를 확인했다. 두 시간쯤 진행된 집 상태 확인 작업을 마치고 우리는 우리의 이사를 위해 다시 파리로 넘어갔다. 


함께 살게 될 친구 집에 미리 내 이삿짐을 다 옮겨놓았다. 그곳으로 트럭을 불러 한번에 짐을 실어올 참이었다. 시간이 남아 잠시 나를 재워준 친구네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친구가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 집 열쇠가 두 동강이 나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열쇠가 부러졌다고? 열쇠가 부러졌다는 건 한 번도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친구가 사진을 보여줬는데 정말 비현실적으로 열쇠가 부러졌다. 트럭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그 사이에 문을 따야 했다. 


부러진 열쇠와 뉴욕 지하철 카드 


나는 먹던 점심을 내팽개치고 뉴욕 지하철 카드가 잠긴 문 여는데는 직방이라는, 지난날 나를 재워준 뉴요커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아파트의 문은 너무 깊고 단단했는지 뉴욕 지하철 카드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부러진 열쇠 조각을 가지고 가서 복사를 해오려고 시도했고, 우리는 여기에 남아 열쇠공을 부를 참이었다. 그런데 모든 열쇠공들이 빨라야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그 가격도 평균 100유로 돈이었다. 그 와중에 트럭이 이미 출발해서 취소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봐도 이렇다 할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트럭이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이미 그 시간마저도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커다란 트럭이 도착했고, 우리가 싣을 수 있는 짐의 전부였던 내가 가지고 있던 캐리어 두 개와 친구들의 자전거 두 대를 싣고 나니 그 빈 공간이 더 커 보였다. 고작 이걸 싣으려고 이 큰 트럭을 불렀던가! 이런 허탈함을 느끼고 있던 순간 열쇠를 복사하러 갔던 친구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심장이 뛰고 아드레날린이 솟았다. 우리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아파트로 올라갔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잘 돌아가서 문이 열려야 하는데, 맘처럼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듯이 친구는 돌아가지 않는 열쇠를 계속 돌려본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문에 탁 하고 열렸다. 이렇게 희열이 느껴지는 순간이 근래 있었던가? 우리 모두 환호성보다 더 깊은 단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뱉어내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짐을 빼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라 모든 짐을 프랑스식 4층 높이에서 손으로 직접 다 옮겨야 했지만 이사를 무사히 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에 힘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이제야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옷이 금방 젖어버릴 정도의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머지 두 친구는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나는 지하철로 집까지 가기로 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 오는 날 이사를 가면 잘 산대, 비 오는 날 이사를 가면 잘 산대...'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게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액땜을 했으니 우리는 새로운 집에서 얼마나 대박이 나려나 하는 조금 웃긴 상상을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짐을 다 옮기고 나서도 이사를 온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머무르게 될 방을 정하고 간단히 청소를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고양이 오줌이라는 새로운 난관이 생겼지만, 더 이상의 사건을 해결할 힘이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심각한 것만 해결하고 내일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친구들과 피자를 시켜먹었다. 

내 정신머리를 대변하는 이사 직후의 모습

우리는 이삿날 짜장면이지만 여기선 왠지 피자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것저것 다양한 메뉴가 배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역시 이삿날엔 짜장면, 아니 피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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