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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Jun 23. 2023

맨스플레인과 성폭력 피해의 관계성

성추행 고소를 고민하다 마주한 생각들 (3)

최근 멀어진 사람이 있다. 직장에서 알게 됐고 나이 차이도 꽤 나지만 마음이 통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온 사이였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분과 1년 넘게 연락을 쉬고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그분(A라고 하겠다)은 동거 중인 그분의 남성 반려인(B라고 하겠다)과 함께 만나는 자리를 좋아했다. 아마도 A님보다 B님이 더 적극적으로 원해서 매번 그런 자리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B님은 좋은 분이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다 생각하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그분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리가 거듭될수록 불편한 느낌이 강해졌다. 심지어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혼자서 자리를 빠져나온 적도 있다.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그분의 '맨스플레인'이었다.

(*맨스플레인: Man과 Explain의 합성어.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에세이가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단어다. 2010년 뉴욕 타임스 '올해의 단어'로 꼽혔고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실렸다)


그분은 네 사람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본인이 원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했다. 나머지 세 사람(모두 여자)의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몇 번이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화제를 다시 꺼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명백히 원치 않는 화제인데도 흐름을 끊고 무리하게 화제를 전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경우 그 말을 듣지 않고 원하는 방향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 씨, 0000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라는 식으로 화제를 던지는 것도 전형적이고 익숙한 맨스플레인의 방식이었다. 경험으로 거듭 확인한 바, 여성보다는 남성이 그런 식으로 화제를 꺼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 상대방과의 정보 격차를 확인하기 위해 정말로 그걸 아는지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남성의 경우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모임에서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 같은 화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상대방이 그 정보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답해도, 심지어 상대방이 자신보다 그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도, 상대의 대답에는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길게 설명하며 자기 기에 빠져드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경우는 오히려 나은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당연히 모를 거라는 전제로 가르치듯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도 그만큼 많다.


대학원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늘 지켜보았던 회식자리 교수들의 이야기 방식이 대표적으로 그랬다. 교수들이라면 한 분야의 전문가이고 스승이니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몸에 배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교수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대학 동기도, 동갑내기 남사친도 대부분 조금씩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많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성 역할에서는 '사회적 권력'을 중요한 생존능력으로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에서 권력적으로 우위를 점하려 노력하는 것을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편으로서 습득한 것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여자들은 남자보다 쓸 만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할 거라는 무의식도 작용하지 않을까. 아마 B님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으로 일시적 권력의 우위를 점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만들기는 어렵다. 누구나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는 들어주고 남자는 이야기하는 구도, 남자는 가르치고 여자는 청하지 않은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는 구도에 익숙해진 남자들의 대화 패턴 속에는 그대로 비쳐보인다. 여성을 남성의 서열 아래로 두고 있는 발화자 남성의 무의식이.

(리베카 솔닛은 여성도 남성을 가르치려 들곤 하지만 그 양상이 남성만큼 성 역할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거나 서열관계의 문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 B님의 맨스플레인이 내게 큰 스트레스가 된 건 내가 일생동안 아버지의 그런 대화 방식을 온몸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다. 

받아낼 수 있는 만큼을 넘으면 그릇에 넘쳐 흐르는구나.

그분 때문에 A님과의 관계마저 포기하다시피 하는 마음이 됐을 때 그렇게 느꼈다.

A님은 매번 B님과 함께 모임을, 파티를, 여행을 하자고 권유했고,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피하다가 더이상 거절할 수 없어지면 마지못해 참여했다. B님이라는 사람 자체가 싫은 게 아니었고 A님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기 때문에 늘 갈등했다.

하지만 어느날 참여한 모임에서 B님의 대화 방식에 계속 서늘한 분노를 꾹꾹 눌러참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런 만남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맨스플레인'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말을 많이 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현들을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문제는 왜 사람들이 여성이 말을 일축하려는 충동을 느끼는가, 그리고 그런 비난이 왜 그렇게 자주 여성은 대단히 부조리하거나 히스테릭하다는 비난으로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부조리와 히스테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받는 비난이다.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154쪽.


어떤 남성과 대화할 때 내가 하는 말을 쉽게 믿지 않을 거라는 불안이 느껴진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등 어떤 근거를 대서 내 말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따라다닌다면, 잘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맨스플레인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스라이팅의 한 형태다.


단순히 기분이 좋고 나쁘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쉽게 믿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은 보호받기 어렵다.


지압사가 지압 중 내 음부를 처음으로 애매하게 건드렸을 때, 나는 성추행이라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편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나이 많고 목소리 큰 남자, 즉 봉건적인'가부장'의 모습이었던(치료 권력까지 가지고 있던) 지압사 할아버지는 말했다. 딸, 며느리 같은 애들한테 자신이 뭘하겠느냐고 했다. 네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네가 생각을 바꾸라고 했다.  몸과 감정에 대한 권리를 말하는 내 목소리는 작았고, 내 영역을 침해하고 있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컸다.


내 뼛속까지 배어있는 억압의 기억이 나를 더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자, 특히 어른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가정에서의 가르침. 권력을 가진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상냥하게 웃어넘겨야 평화가 유지되고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던 사회생활. 내 무의식은 거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의심하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 타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하는 말을 쉽게 과장, 엄살, 생떼 같은 것으로 치부하려 한다. 여자들이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여자들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는 편견으로 사회적인 문제들을 지워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나보다 더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이 내가 겪은 성폭력을 '과민반응'이나 '거짓말'로 취급할 거라는 불안.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그 불안을 이겨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방금 모기에 물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만일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에게

"너도 미투냐?"

"미투 시작되고부터 꽃뱀들이 판을 친다"

"요즘은 남자들이 약자다. 주장만 하면 다 범죄자 프레임이 씌워진다"라는 시선부터 무작정 날아든다면,

그건 여성의 말이 신뢰받지 않는 사회라는 뜻이다.

발언권이 남성에게 기울어있다는 뜻이다.

,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사회라는 뜻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동안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에서 한 부분을 더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131-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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