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내 삶의 성폭력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남은 상처
“고소를 했다면 저도 상처를 많이 받았겠죠…”
몇 년 전, 한 동료를 만나 대화할 때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이 그랬다. 그는 성추행 가해자를 고소한 뒤 고된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폭력 경험을 직접 언급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일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 숱하게 성폭력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위로 대신 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시점으로 2년 전, 한 지압원에서 성추행을 당했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마치 고소를 피하는 게 당연하다는 투의 말까지 덧붙였다. 며칠이 흐른 뒤에야 아차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힘겹게 싸워온 피해자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내기는커녕 서로의 선택 사이에 선을 그으며 내 입장의 합리화만 생각한 것 같았다.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뒤늦게 긴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꼭 알려달라는 말도 함께 건넸다. 다행히 그분은 내 사과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는데, 그때의 실수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런데, 그와의 대화를 곱씹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깨달았다.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남은 상처’가 더 깊은 상태라는 것을.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나 역시 복합적인 성폭력의 피해자다. 아홉 살 때부터 불과 며칠 전에 이르기까지,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성폭력을 겪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 표현도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을까.’
문득, 어떤 대응을 해야 한다는 고민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와 나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오래된 일들은 그렇다 치고, 당시 기준으로 2년 전의 나는 38살이었다. 왜 그때까지도 내가 겪은 일을 정확히 범죄로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는 말해야 할 ‘평범한’ 성폭력
그동안의 성폭력 경험을 모두 대응할 수는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상처를 무력감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씩 나를 치유할 방법을 찾아 나갔다. 연락이 닿는 가해자들에게는 사과를 요구하고, 법적 대응을 고민하고, 내게 단 한 번도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부모와 대화했다. 페미니즘과 성폭력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다른 성폭력 피해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쉽게 풀릴 일은 아니었다. 덮어둔 상처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가해자뿐 아니라 주변 반응과 사회적 편견이 마음을 덧나게 했다. 오랜 시간 굳은 퇴적층 같은 피해의 잔재를 걷어내는 동안, 이 과정이 얼마나 외로운지 절절히 느꼈다. 인터넷을 뒤져도 비슷한 상황의 피해자가 쓴 글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넘쳐나는 통계와 달리, 피해자가 직접 기록한 이야기는 놀랄 만큼 적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전문가의 글이 아니어도, 지독한 폭력이 아니어도, 일상의 성폭력을 겪으며 살아온 당사자의 기록이 많아져야 한다고.
성폭력은 종종 ‘특정 순간’이나 ‘극단적 피해’로만 인식된다. 사회적 관심은 사건의 크기나 가해자의 유명세에 따라 결정되고, 피해자의 감정과 일상은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성폭력은 평범한 하루 속에 공기처럼, 마치 당연한 흐름처럼 스며든다.
내가 친족 모임, 학교, 직장, 거리 등에서 수없이 겪은 성폭력들은 대부분 “그 정도는 다 겪는다”는 말로 무시되었다. 어릴 때는 친구들도 모두 겪는 일이라 당연한 줄 알았고, 별일 아닌 일로 치부하는 주변 어른들의 반응을 내재화했다.
돌아보면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여성들도 많았다. 한 후배는 어린 시절부터 친조부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주변 친족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고백했고, 성폭행 트라우마가 있는 한 동생은 남자친구의 컴퓨터에서 강간 포르노들을 발견한 뒤 충격을 받아 헤어졌다고 말했다. 가장 친한 친구 역시 청소년기에 일어난 성폭행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종종 말해 주었다.
그들의 고백에 나는 놀랐고, 마음이 아팠다. 성폭행은 주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실감했다. 한편 그러한 인식이 스스로를 억압하기도 했다. 성폭력을 겪을 때마다 더 심한 일을 겪는 여성이 많다는 이유로 ‘나 정도는 감내해야지’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던 것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굳이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상대가 더 심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니까. ‘같이 화를 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화제’라는 인식도 경험을 통해 내 안에 스며있었던 것 같다. 성폭력을 불편한 주제로 취급하는, 그리고 피해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서 찾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펴낸 책 『보통의 경험』(이매진, 2011)에 따르면, 20대~40대 여성 중 가벼운 추행을 경험한 비율은 94퍼센트에 이르고, 그중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2.3퍼센트에 불과하다. 실제 일상에서 성폭력은 숨 쉬듯 일어나는데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 상황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피해자를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실제로 2024년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여성폭력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겪은 가장 심한 성적 폭력 경험 당시 대응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8.5%가 ‘대응해도 별다른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36.3%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9살 때 겪은 성추행에 대해 말하지 못한 경험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같은 상황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학교, 직장, 공공장소 등 도처에서 쌓여온 성폭력들은 내 몸과 마음의 건강, 관계를 맺는 방식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안다. ‘작은’ 성폭력을 묵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잔인한 성범죄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페미니즘, 침묵을 깨는 말하기
마침 그 시기, 나는 몇 년간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피해를 인식하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접했지만, 그것은 연구자나 운동가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저, 봄알람, 2016)를 읽고, 일생 억누르며 살아온 감정과 생각들이 사실은 타당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씌워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페미니즘은 내게 더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그건 내 일상, 지금 순간의 나에 얽힌 이야기였다
나는 싸움이 무섭고, 비판받는 것에도 민감하다. 그런데 ‘페’자만 꺼내도 장작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일이 되는 이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알아야만 했던 건, 그것이 내 안에서 분열된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을 알수록 스스로와 화해할 수 있었고, 그동안 침묵하게 만든 사회 구조를 보게 됐다. 경험을 정의하고 분석할 언어도 생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논조의 글을 쓰는 건 남의 일 같았다. 소위 ‘화력’이 좋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여겼고, 막연히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왜 나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았을까’, ‘왜 참기만 했을까’를 스스로 묻게 된 것은, 내 동료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어렵게 묻어둔 기억을 되살려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글과 말을 통해 생각을 전환하고 치유를 얻었기에 이 연재를 시작한다.
〈해도 되는 이야기〉는 내가 겪어온 일상 속 성폭력과 그 후유증에 대해 여러 대응을 고민하며 얻은 경험과 생각의 기록이다. 한국 사회에서 나를 지킬 최소한의 힘을 갖기까지 42년이 걸린 여성으로서, 피해자 말하기의 과정을 사회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이다.
여기에 극적인 법적 전개나 완벽한 치유 서사는 없을 것이다. 모든 성폭력 상황에서 똑부러지게 대응하는 여성이 노하우를 알려주는 글도 아니다. 대신 ‘이 정도면 다행이지’, ‘다들 겪는 건데 뭐’라는 말로 묻어둔 기억에 아파하는 분들께, 피해를 입은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을 미워하는 분들께, 어디에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분들께, 그리고 피해를 말하고 듣는 일이 서툰 모든 사람에게 이 평범한 이야기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피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날마다 수없이 일어나는 일인 만큼, 피해를 입은 누구나 ‘해도 되는 이야기’이다.
과거의 성폭력 사건을 지금 꺼내 해결하고 싶은 데는 전보다 좀더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도저히 물러설 데가 없을 때 비로소 그 사건을 해결해 보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는 인생의 전환점이거나, 그 일을 다시 돌아보고 정리할 만한 에너지가 생긴 때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조금 안정이 되고 힘이 생겼을 때, 갑자기 잊고 있던 그 사건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거죠. 미루어둔 숙제를 풀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보통의 경험』, 223쪽.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노동,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
출처: 내 삶의 성폭력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남은 상처 - 일다
2년 전 힘든 상황에서 대강 써둔 초고를 두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과연 제가 완성할 수 있는 연재인지 확신하지 못했었어요. 그러다 최근 새로운 경험들이 추가되면서 용기 내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연재 제안을 보냈습니다.
조이여울 편집장님께서 오래 써온 제 글들을 살펴보고 내 글을 믿어주셨고,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제 공간 안에만 있던 '해도 되는 이야기'라는 연재명이 그대로 일다에 걸리니 약간 뭉클하더라고요.
여전히 두려움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충실히 해나가는 데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최근 조국혁신당 사태를 보며 많은 생각과 감정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데는 이렇게도 많은 힘이 들고, 많은 상처가 필요하구나.
피해자의 호소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고 오히려 비난, 가스라이팅한 사람들의 2차 가해 이야기가 참으로 잔인하게 들립니다.
그걸 겪어내는 게 어떤 마음일지,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알기에 피부로 와닿습니다.
강미정 전 대변인의 용기를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