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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르 Nov 11. 2020

익숙하고 낯선 나의 한국 3

독일 거주자의 한국 여행기 - 시댁

 독일의 집을 나선 지 20시간 만에 우리는 한국의 집에 도착했다. 거실 바닥엔 대나무 돗자리가 깔려있고 베란다엔 핑크색 말랑말랑한 슬리퍼와 다육이 화분이 줄지어 있는 익숙한 시댁의 모습이다. 다만 오늘 이곳엔 우리를 기다리는 식구들은 없다. 



 짐가방은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먼저 비누로 뽀득뽀득 손을 씻고 변기에 앉았다. 멍해진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뒤처리를 위해 집어 든 휴지가 너무나도 축축했기 때문이다. 아 여기 한국이지. 손끝에 전해진 한국의 습한 여름이 낯설었다. 두어 칸 잡아 끊으면 탁 소리와 함께 먼지 폴폴 날리는 독일의 휴지가 살짝 그립다고 생각하며 변기 뚜껑을 닫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둘러보니 이곳에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까지 시어머니가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바닥은 발자국 하나 없이 반짝거렸고 우리가 쓸 이불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예쁘게 접혀있었다. 밥솥엔 새로 지은 밥이 가득 차있었고 가스레인지 위 미역국과 김치찌개 냄비는 아직도 뜨거웠다. 시어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나는 조금 슬퍼졌다. 곧 두 돌이 되는 딸아이와 함께 이 곳에서 오롯이 2주를 보내고 나면 이곳은 오늘의 반짝거림을 잃게 될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가격리 기간 동안 우리끼리만 지낼 테지만 그래도 이곳은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곳. 시어머니의 살림살이를 내가 이용한다는 생각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내 사이즈가 아닌 옷을 2주간 빌려 입고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는 기분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 옷을 돌려주기 전 깨끗하게 빨아놓고 곱게 접어서 돌려주고 싶을 것이다. 캐리어를 활짝 열고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2주 동안 아주 편하게 지내다가 마지막에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빌린 살림살이니 처음부터 조심하며 지내는 게 좋을까.


 다행히 시부모님들은 나를 귀하게 여겨주신다. 남편보다 더 대접받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시댁은 시댁이지 않은가. (시댁이 싫어 시 자가 들어간 시금치나물도 안 먹는다는 옛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런 내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남편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주 편안해 보였다. 익숙하게 서랍을 열어 예전에 입던 자기 옷을 꺼내 입고 익숙하게 드러누워 티비를 켰다.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왠지 얄밉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짐을 대충 꺼내놓고 빈 캐리어들을 어디에 둘지 고민했다. 현관 앞에 놓는 게 좋을까 작은 방에 넣어두는 게 좋을까. 남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소한 것도 며느리 입장에선 신중하게 고민할 일이 되곤 했다. 문득 내가 느끼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이 감정을 친정집에서 남편도 똑같이 느끼는지 궁금해졌다. 


 아직 시어머님의 아우라가 가득한 이곳에 조심스럽게 내 물건을 꺼내보았다. 알록달록한 딸아이의 옷과 장난감은 아무렇게나 있어도 괜찮았지만 왠지 내 화장품과 옷가지는 잘 안 보이는 곳에 깔끔하게 정돈해 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빨간색 레이스가 달린 속옷까지 다 꺼내놓으니 왠지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시댁 거실 한복판에 아끼는 속옷을 던져놓으며 나는 2주간의 자가격리(feat 시댁)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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