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말고 레벨테스트
'레테'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여신? 저승길 갈 때 한 모금 마셔야 한다는 망각의 강?
대치동에서 레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바로 레벨 테스트.
입테(입학 테스트)라는 유의어도 있지만,
학원 신규 입학 시 혹은 재원 중 레벨 확인을 위해 보는 시험들을 통칭 레테라고 부른다.
대치동 학원가에서만은 국가고시 못지않은 열기를 보이는 레테가 몇 개 있다.
일단 초등학교 입학 전 7세 늦가을~겨울에 보는 영어 학원 레테.
2~3년씩 영유를 다니고 초등 입학을 앞둔 '예비 초등' 시기가 되면 대치동 엄마들은 바빠진다.
앞으로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을 다닐지 모를 초등 영어 학원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
설명회에 참석해야만 레테 신청 기회를 준다는데 설명회조차 빛의 속도로 마감되어 망연자실하기도 하고,
피시방에서 사전 연습까지 한 끝에 핫하다는 학원의 레테 신청에 성공하기도 하면서
고작 일곱 살짜리들을 많게는 대여섯 번의 레테에 밀어 넣는다.
합불은 물론 어떤 레벨의 반에 합격했는지의 결과도 대체로 공유되고
모 영유에서는 인기 학원 레테에 죄다 떨어지고 잠적한 엄마가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새 영유의 목적은 초등 영어 학원 레테가 되어버리고,
7세 때 영유를 그만두고 다니는 'xx 영어 학원 프렙', 초등 학원 레테를 대비하는 과외가 생기고
영유 입학 설명회 때는 "졸업하면 초등 때 어떤 학원에 갈 수 있죠?"라는 질문이 주를 이룬다.
영어 레테의 절정이 초등 입학이라면, 수학 레테의 절정은 초등 2~3학년 말에 보는 유명 수학 학원 레테이다.
실제 학원을 보내려고, 붙고 나서 보낼지 말지 결정하려고, 그냥 우리 애 실력을 점검해보려고 등등 다양한 이유로 시험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레테 당일날 일대 교통이 마비되고 근처 커피숍은 학부모 대모임이 되어 서로 머쓱한 눈인사를 나눈다.
수학 학원을 다니지 않던 영재조차 학교에 다녀와서 xx라는 학원이 대체 어떤 학원이길래 우리 반 애들이 다 시험 봤다고 하느냐고 물었을 정도이다.
오전, 오후로 나뉘어 있어 오전반 수험생(?)들에게 문제를 복기시켜 오후반 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사람이 등장할 만큼 핫하다 못해 뜨거운 시험이다.
이렇게 초등 고학년이 되면 길이 조금씩 나눠지기 시작한다.
고1 과정인 수상하를 끝마칠 때쯤 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속칭 켐오)에 도전하고자 경시 대비반 레테를 보기도 하고, 우직하게 고등 과정까지 선행을 계속하는 학원으로 옮기기도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대치동 전문용어로 '예비 중등') 중등 대상 수학 학원으로의 대이동 레테를 보고,
영어도 초등에서 해왔던 4대 영역(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 중심 과정에서 중고등 내신 및 수능을 위한 '한국식' 영어 학원으로 갈아타는 레테를 본다.
심지어 국어 학원도 수능 모의고사 수준의 레테를 보는 경우도 있어 불합격하는 아이들이 제법 되기도 한다.
대치동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레테에 울고 웃는다.
학원 성적으로 대학 가는 것도 아닌데 부모들은 레테 결과에 분노하기도 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분명히 내 돈과 노력을 들여 학원에 보내는데 내가 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 모든 건 본질적으로 부모는 자녀가 잘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집 애들이 다니는 학원 정보를 몰라서, 그들이 입학 전 어떤 공부를 해놓는지 몰라서 우리 아이가 뒤쳐질까 봐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이다.
대치동 부모들은 오늘도 불안과 싸우며 우리 아이에게 잔소리하고, 잠든 아이를 보고 폭풍 후회하며 더 많이 사랑해주자 다짐해보다가도, 다음 날 아침 늦잠 자는 아이를 보면 샤우팅 발성의 정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도 부족한 인간인지라 아이를 키우며 함께 성장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