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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Mar 19. 2020

홍콩 언니, 홍콩 가출기

0. 프롤로그 - 내 10년을 쏟아부은 홍콩을 가출하다



홍콩을 떠나 6개월 간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코멘트 중 하나가 "돈 많이 모아놨나 봐?"였다. 

처음에는 그런 게 궁금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들에게서 재차 그 질문을 듣게 되자 뭔가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날 비꼬는 건가, 그러면서 나도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정말, 6개월 간 여행을 할 '돈'이 없기 때문에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홍콩을 가출하기 전 약 3년간 살았던 나의 네이버후드, 완차이. 하늘을 찌를듯한 고층빌딩과,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해와 트램이 공존하는 그곳. 나의 제2의 고향 홍콩

처음부터 확실히 하자면 내가 뭐 돈을 쌓아 놓고 있어서 여행을 떠났던 건 절대 아니다. 난 휴식이 필요했을 뿐. 변화가 필요했다. 매일매일 굳은 표정으로 출근하는 얼굴들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정말 드물 게 평소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 회사 앞 한 커피 체인점에 앉아 커피를 한 잔 하며 밖을 구경하는데 순간 신호등이 켜지고 비슷한 옷을 입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사무실 건물들로 들어갔다. 순간, 난 설명하지 못할 생경함과 그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나도 저들 중 하나인 걸까?' 그러니까, 마치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듯 어디론가 일제히 움직이는 무리들. 먹이를 찾아 나서는 일개미들 같기도 하고 양치기 개에 쫓기는 양 떼들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로 들어가 일하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다음 날 다시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고. 나, 평생 저렇게 살면 어떡하지? 빈속에 들이부은 카페인 때문인지, 정말 그 순간 공황장애가 왔는지, 손발이 차가워지고 순간 이상한 불안감이 내 몸속 깊숙이 엄습했다. 뭘 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속을 게워냈을 수도.


물론 그 한순간이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무모할 수 있는 - 아니다, 이건 정정하자, 고백하건대 나는 20대 초반 이보다 더 무모한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에 서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 아무튼, 이 한순간이 인생에서 두번째로 무모한 결정을 내리게 한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 혈혈단신으로 홍콩에 넘어와 10년 동안 치열하게도 일을 했다. 홍콩 금융권이라는 삐까뻔쩍한 타이틀을 가지고, 한국에 비해, 나이에 비해, 높은 타이틀과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정작 난 내 자신이 항상 부족하고 좀 더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박혀 살아왔을 지언 정, 어쩌면 남들이 부러워했을지도 모를 삶을 살았다. 여기서 또 미리 정확하게 말하건대, 나는 홍콩에 있는 금융권 기준으로 고소득층이 절대 아니었다. 워낙에 비싼 곳이라 상대적으로 나의 연봉이 한국의 그것보다 많았을 뿐. 어찌했든 이를 얻기까지 난 참 애썼고, 외로웠고, 힘들었다. 매일매일이 전투와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매일을 단 일 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물론 노는 것도 포함해) 열심히 살았고 또 그 과정에서 물론 매우 즐겁고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힘들어, 피곤해, 너무 쉬고 싶어. 휴식이 간절했다.


평소 자주 가던 루프탑 바의 풍경. 놀라지 마시라, 저 뒤로 보이는 아파트에 사려면 한 달에 최소 월세 1000만 원 이상은 줘야 한다. 물론 난 저 아파트들에 살지 않(못)했다.

그렇게 약 2년 여를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일을 그만둬야 할 즈음에 이직의 기회가 찾아왔고, 승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난 지금 너무 힘들다는 걸. 고된 하루를 마치고 깜깜하고 차가운 내 아파트로 돌아와 불을 켜는 순간이 너무도 싫어 일부로 약속을 잡고 일부러 만취를 해서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분명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고 있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직장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지,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조금만 더 하면 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무엇인지도 모를 그 무언가의 끝자락을 쥐고 그렇게 힘겹게 계속 달렸다. 이 프로젝트만 마치고, 이 정도로 승진만 하고. 그렇게 '맞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만 2년째, 문득 깨달았다. 일을 그만 둘 '맞는 기회'라는 건 없다는 걸. 그 생각이 들었던 날 알았다. 무언가 하려면 지금(right now) 결심을 내려야 한다. 결심이 든 순간 뿌옇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샤워를 했고 - 보통 샤워를 하러 걸어가는 순간부터 하루에 할 일부터 시작해 책상에 앉자마자 뭐부터 해야 하는지, 누구한테 먼저 전화를 해야 하는지 등등의 생각을 시작하고는 했다 - 말끔한 기분으로 나와 출근을 하며 출장 가 있는 보스에게 대뜸 문자를 보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수중에 얼마가 있나 살펴보고, 계획하고, 목적을 세우고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6개월간 여행을 '돈'이 차고 넘쳐서가 아니라, 그냥 이걸 해야겠어서,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리기 전 지나가듯 꺼낸 이야기에 내 속을 바로 알아차리고 "돈이야, 다시 또 벌면 되지" 라며 지나가듯 무심하게 격려를 해 준 지인들의 말이 큰 힘이 되기도 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혹자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네가 딸린 가족이 없어서 그래. 아직 싱글이니까 그래. 그럴 때면 그냥 나도 멋쩍게 웃어 보이며 "그러니까요, 어떻게 때가 잘 맞았죠" 라 대답했지만 사실 나도 욱 하고 그들에게 되물어 보고 싶을 때가 몇 번 있긴 했다. 당신이 딸린 가족이 없다면, 싱글이라면, 혹은 애를 다 키워 놓고 났다면, 그때는 당신도 정말 6개월간 여행을 갈 건가요?


내가 지난 10년간 집이라 부른 곳, 홍콩. 관광객들에게는 예쁜 야경으로 보이겠지만 다 사무실 건물이다. 누군가가 저 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치열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쉬운 건 '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다. 이래서 못하겠고, 저래서 못하겠고. 물론 나도 지난 2년간 그래 왔지만, 그래서 난 여건 상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주변을 탓하며 하지 못할 이유를 찾고 나면 마음에 안정이 온다. 하지만, 그렇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스스로 못할 이유를 찾고 위안을 하고 (혹은 받고) 돌아가는 일상에서, 속된 말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많아서 이렇게도 이를 놓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아무리 '아등바등' 살았어도 결국은 다들 '그럭저럭' 살아왔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6개월 동안 조금은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든 '그럭저럭' 또 살아보려는 것일 뿐 뭐 대단한 걸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말. 한 번뿐인 인생, 6개월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실컷 하며 길에서 시간을 보내는, 술자리에서 "오~~~ 대단한데?" 소리 좀 들을 수 있는 제법 그럴싸한 하루하루들을 보내고자 한 것이 그나마 길을 떠나기 전의 나의 목표였달까. 뭐, 어떻게든, '그럭저럭' 잘 되지 않겠나.


어떤 날은 온 하늘을 붉게 태우고 어떤 날은 보랏빛으로 부드럽게 안아주던 발리 석양. 15분의 매직 아워. 이 짧은 황홀경을 위해 난 거의 매일같이 비치 클럽으로 향했더랬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난 계획했던 것보다 짧은 4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 있다. 장기 여행이라는 것은 내 생각보다 힘들었고 외로웠다. 신용카드 해킹도 당했고, 현금이 털린 적도 있으며, 심지어 핸드폰까지 도난당했다. 아무리 예쁜 곳에서 즐겁게 지내도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와 그 이유도 모른 채 한 밤을 엉엉 울며 지새운 적도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느꼈던 외로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기억한다. 하루 종일 멍하게 입을 벌리며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고 있었던 푸켓에서의 신선놀음 같았던 한 달을, 내 치열한 홍콩의 금융권살이를 주마등처럼 스치게 한 어떤 스위스 할배와의 설전을, 타들어갈 듯이 빛나던 발리의 붉은 석양을,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반쯤 취한 상태로 반쯤 기억 못 할 대화를 하며 낄낄대던 밤을, 바에서 잠깐 만난 남자의 눈빛에서 몇 해 전 덴마크에서 만났던, 홍콩으로 돌아가던 비행기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던 이를 보았던 밤을, 일을 그만두고 이렇게 무모하게 떠났던 것이 과연 잘 한 결정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불안감에 떨던 밤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반가운 지인을 마주치고 밤새 수다를 떨던 밤을,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역시 길을 떠나길 잘했어' 란 뿌듯한 맘이 들었던 순간을.


그리하여 내가 나눌 이야기는, 지난 4개월간의 나의 여정이자, 홍콩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얼마나 처절히 열심히도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순간순간 나의 가슴에 꿈틀거림을 선사했던 지나간 사랑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노여워하고, 외로워하고, 그렇게 열심히 '그럭저럭' 살아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자, 지나고 보니 정말 '반짝반짝' 했던, 나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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