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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Apr 25. 2020

홍콩 가출기 #3-3. 밥 잘 사 주는 옛날 영국 오빠

1-3. 모든 것은 2015년 12월 25일, 그 날 시작이 되었다

커피 대신 술을 마시기로 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위를 기울이지 않을 테지만, 1년이나 묵힌 이야기를 밝은 대낮에 표정 하나하나 다 보이는 커피숍에서 한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타운턴스 스트리트(Staunton's street)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펍(pub)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제 맥주 리스트도 꽤 괜찮고 음식도 나쁘지 않은데 목이 안 좋아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일찍 나와 펍으로 향했다. 긴장감을 떨쳐줄 술 한잔이 필요했다.


펍이 있는 언덕길을 오르며 우리가 그간 다녔던 레스토랑들이 보였다. 저기선 저걸 먹었었고, 저기선 누굴 우연히 만났었고, 저기선 열렬히도 싸웠었고. 그럴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게 방심하고 걷다 전 연인과 갔었던 곳, 먹었던 음식, 혹은 함께 맡았던 향기를 마주하는 순간 텔레포트가 되듯 그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때론 따뜻한 감상에 빠지고, 또 때로는 심장이 쿵 떨어지고 가슴이 찌릿해지는 느낌. 때로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도 하고. 약속시간 20분 전. 맥주, 또는 와인 한잔 하고 기다리기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칵테일을 즐겨 마시지 않지만 이 곳에 가면 꼭 칵테일을 마셔야 한다. 뱅커/변호사들이 좋아하는 스피키지 바 폭스 글로브(Foxglove)의 대표 칵테일, 뉴욕 사워(NY sour)

"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언덕을 오르느라 살짝 가빠진 숨을 고르며 도착한 펍에 이미 그가 앉아 있었다. "어... 오늘 콜 하나가 취소돼서 일찍 왔어"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지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를 보고 그 또한 살짝 당황한 듯했다. 막 도착한 듯, 그의 손에는 딱 한 모금 정도 마신 것 같은 맥주가 쥐어져 있었다. "그래? 잘됐네. 이렇게 보니 좋네."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안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만나자마자 이야기를 쏟아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색했다. 꼭 오늘 처음 선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한 때는 침실에서 나의 가장 친밀한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렇게 어색하고 긴장하며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오고 갔다.


"뭐 먹고 나왔어? 안 먹었음 뭐 먹을래?"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마침내 그가 입을 먼저 열었다. "그럴까? 근데 뭐가 넘어갈지 모르겠네. 지금 먹으면 체할 거 같기도 하고" 긴장감에 의도와는 다르게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듯한 대답이 나왔다. "우리 싸우러 나온 거 아니잖아. 이러지 말자고" "그거 하지 말랬지? 주름 생긴다고 안 본사이 확 늙은 거 같아" 그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쳤다. "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진짜 늙어가나 봐. 요즘 흰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더라고. 너가 봐도 좀 그래 보여?" "그러다 그 밑에도 흰 털 나는 순간 완전히 가는 거지"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놀리듯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는 내 조크에 혼자 깔깔거리며 숨 넘어가듯 웃었다. "너 진짜 가끔 완전 저질인 거 알아?" 그는 인상을 확 지푸리더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나를 보듯 말했다. "그게 내 매력 아니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 아주 고상한 표정을 짓고 샴페인을 마시다가도 트럭 운전수나 할 법한 더러운 농담을 던지고. 이거 누가 나한테 했던 말 같은데?"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랬었나? 하하 근데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네. 하긴, 그래서 내가 처음에 너한테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신기하더라고, 사람들 주목도 잘 끌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너가 항상 중심에 있고는 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난 날도 그랬고"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이 곳에서, 나를 떠올릴까?' 택시, 버스, 트램, 그리고 사람들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애드미럴티의 풍경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스타운턴스 바(Staunton's bar). 하얀 비니. 시끄럽던 바. 목소리 높이며 팔씨름하던 사람들. 서로에게 오고 가던 눈빛, 그 사이에서 피어나던 묘한 떨림. 그의 그 한 마디에 난 어느새 음악이 시끄럽게 쿵쾅거리던 그때 그 바(bar)로 텔레포트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넌 내 여자 친구가 될만했어" 그는 잠시 멍해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두 손가락을 튕겨 내 머리를 툭 쳤다. "여자 친구가 될만했어?? 내가 너 만나준 거거든? 참나, 잘 나가다가 꼭 마지막에 재수 없는 말 해서 짜증 나게 하더라" 어느새 현실로 돌아온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눈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애야? 왜 자꾸 머리 치는 건데?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뭐 먹을지나 골라" 6살의 나이 차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30대 초반이면 애 소리 들을 나이가 아니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씩 나를 애 취급하곤 했었다. 내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아이들 대하듯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나를 놀릴 때면 꼭 어린 여동생을 골리듯 머리를 툭툭 장난스럽게 치거나. 그 때면 머리 망가진다며 짜증을 내긴 했지만 사실, 기분이 영 싫지는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정말 한없이 다정했기에.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기에 우리는 원하는 바가 뚜렷하고 생각이 많은 복잡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항상 불꽃이 튀었다. 그게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이끌림에서였건 갈등으로 인한 다툼의 형태였던 건간에. 대화 하나를 해도 항상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탁구대에서 탁구공이 이리저리 팽팽하게 핑퐁 거리며 튀어 다니는 느낌이었달까. 내가 한마디를 하면 그 한 마디를 그가 받아치고, 또 이를 내가 받아치고, 그러다 누군가가 제대로 된 강 스매싱 (싸움의 의미가 아닌 재치 있는 면에서)을 날릴 때면 우리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아 정말 이 사람과는 정말 하루 종일 앉아 대화해도 지루하지 않다.


그는 상당히 똑똑했다. 머리 좋은 게 유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가족들을 보면 그는 꽤나 엘리트 집안 출신인 듯했다. 그의 어머님 쪽 가족들은 1979년 이란 혁명(Iran Revolution)*시 이를 피해 해외로 도망친 전형적인 이란 부유층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미국으로, 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정착했다. 4 자매 중 세 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의대를 갔고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신경전문의부터 시작해 산부인과, 외과 교수 등으로 이름을 날리고 계신다. 그녀들의 자제들 또한 다들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들었다.


*이란 혁명: 1979년 2월 팔레비 왕조의 국왕 독재를 무너뜨리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 1901~1989)의 지도하에 이슬람 신정체제를 수립한 혁명으로, 그 과제와 목표는 이슬람혁명으로 표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R의 어머님은 영국으로 건너와 집안 자체는 부유하지만 썩 영석하지는 않았던 영국 청년(R의 아버지, 그리고 이것이 그의 본인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았다. R에 따르면 자신의 어머니만이 자매들 중에 유일하게 공부는 안 하고 클럽에 놀러 다니던 날라리였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아마도 가장 똑똑한 이가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아버지와 이혼 시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재밌게 놀러 다니고, 이혼하고는 R과 R의 형 두 아들들이 주는 돈으로 전 세계 이 곳 저곳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놀러 다니시니. 그러고 보니 그 날 그의 말에 내가 "나 너 여자 친구 말고 너네 엄마 하면 안 돼?"라고 물어 R이 정말 배를 잡고 웃었더랬었다.


R의 형은 금융 변호사인데 몇 년 전 영국에서 가장 최연소로 로펌의 파트너가 되어 신문에도 나왔었다고 한다. 그 당시 R의 소파에 누워 배달 온 파투쉬 샐러드(Fattoush, 마른 빵을 부셔 넣은 것이 특징인 레바논식 샐러드)를 먹으며 형이 잘 된 것에 대한 기쁨과 자신보다 뭔가 업적을 이룬 것에 대한 질투심이 묘하게 섞인 목소리로 형에게 축하인사를 전달하는 그를 관찰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전화를 끊자마자 "He is fucking asshole, but he is fucking brilliant (형은 진짜 개새끼야, 하지만 진짜 열라 똑똑한 놈이야)라고 말을 했었다. 언제쯤 돼야 형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라는 낮게 읊조림과 함께. 그렇게 말은 한다 해도 R 또한 30대 후반의 나이에 미국계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의 아시아/오세아니아 헤드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사실 그 또한 꽤나 명석한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본인의 타이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을지언정.



You are such a beauty, you are such a pain. But I'm still very proud to call you my second home

어렸을 때는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타입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30대가 넘어가고부터는 확실히 인물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 그가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 나를 끊임없이 지적으로 자극을 시키는 대화들, 그런 능력에서 오는 자신감 등에 끌리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우스울 수도 있지만, 나도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자신을 부단히 푸쉬하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고. 그냥 그런 것들이 좋았다. 존경할 면이 있는 사람, '와 저 사람 정말 멋지다'라는 생각이 절로 나올 정도로 스스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


그런 면에서 R과의 대화들은 내 지적인 것들에 대한 갈망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거의 24시간을 일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에 나와의 대화의 대부분도 일 관련한 것들이 많았다. 물론, 어디 가서 이 이야기 절대 하지 말아라, 기밀이다 (실제로 기밀인 것들이 많았다)라는 주석을 꼭 붙였지만. 누가 보면 참 지겹겠다 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난 그런 게 꽤 좋았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내가 일하는 분야와 얼추 겹치기도 했고, 쓸모없는 지식이라는 건 없으니 알아서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고. 사실 내가 가보지 못한 그의 길이 무엇인지 상당히 궁금하기도 했다. 또 어떻게 보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잘 나가는 삶에 대한 대리만족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드라마 주인공을 보며 감정이입을 하듯이.


나 못지않게 꽤나 다혈질인 그의 성격과 대비되게 그는 정말 의외로(!)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할 때면 정말 한없이 다정하게 아주 꼼꼼히 설명을 해주었다. 아무리 기초적인 것일지라도 절대 조급해하지 않고, 절대로 한숨을 짓는 다던지 하는 제스처 없이 내가 완벽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내 그 어떤 질문들도 바보 같다 하지 않았고, 뭐 그런 걸 물어보냐며 핀잔을 준 적도 없었다. 무엇을 물어보건 '그건 참 좋은 질문이야'라고 시작하며 그의 지식을 나눴다. 내가 내 의견을 낼 때면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아주 좋은 지적이야' 라며 그 나름의 칭찬을 듬뿍 해주기도 했다. 일부러 뭘 배우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와의 일상적인 대화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켓에 대한 많은 정보나, 통찰력들, 새롭게 보는 눈들을 얻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남자 친구이자 멘토이기도 했다.


또 하나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음식. 웃기는 말이지만 정말로 음식.


"그럼 우리 오늘 이 곳에서 뭘 박살 낼지 볼까?" 음식 메뉴를 훑던 그가 나에게 갑자기 말을 던졌다. "좋아. 나 타코 먹고 싶었는데 하나 시켜도 돼?" "당연하지, 어차피 4~5개 시켜서 나눠 먹을 거 아니야? 타파스 스타일로" 그는 나를 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들고 있던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근데 너 그거 알아? 우리는 최고의 eating partner라는 거" "eating partner?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영국 사람이라고 없는 단어 지어내지 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 또한 남은 와인을 쪼르륵 마셨다. "나 완전 진지해 지금. 한 번 생각해봐, 우리 지난 8개월간 정말 열심히 먹으러 다니지 않았어?" 그의 말에 잠시 나 또한 생각에 잡혔다. 한 때 꽤 규모가 큰 싸이월드 블로그를 운영한 적이 있다. 요리를 하고 레시피를 올리거나 맛집 리뷰를 올리거나 하는 블로그였는데 아주 잘 나갔을 때는 하루 방문자가 10만 명 이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음식을 먹는 것과 하는 것을 모두 다 잘한다는 자신과의 주장과는 달리 요리에는 소질이 크게 없어 보였는데 (사귀는 기간 동안 음식 해 준 적이 두 번 정도 있으려나? 그것도 스테이크!) 음식에 대한 조예만큼은 정말 상당히 깊었다. 역사, 지리 방면까지 아우르는 음식에 대한 지식 자체가 정말로 풍부했고, 맛있는 음식, 멋진 분위기, 맛있는 와인들을 즐기고 또 이를 아주 감사하는 사람이었다.


영국 오빠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카본(Carbone). 미드 슈트(Suits)의 주인공 하비가 뉴욕에서 즐겨가는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사악한 가격이지만 너. 무. 맛있다!

그는 홍콩에서 VIP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 클럽 서비스에 가입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휴가 예약부터 레스토랑 부킹까지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멤버십 클럽 같은 것이었다. 그의 멤버십 덕분에 우리는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아주 유명한 미슐랭 레스토랑들을 제외하고는 - 사실 그런 곳들도 대부분 일주일 이내로 예약/식사가 가능했다 - 홍콩 내 모든 레스토랑에 기다림 없이 바로 예약하고 이용할 수가 있었으며 유명 위스키 브랜드에서 새 위스키를 론칭한다거나, 큰 미술 전시가 열리기 전, 유명 셰프가 홍콩에 레스토랑을 새로 오픈한다거나 하는 이벤트가 있으면 항상 VIP 프리뷰로 먼저 초대가 되곤 했다. 평소엔 일할 때는 거의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런 이벤트가 있을 때면 또 바로 내게 '너 저번에 새로 산 드레스 입을 기회를 내가 물어왔지' 라며 또 득달같이 메시지를 보내는 츤데레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 펍으로 걸어오면서 지나쳤던 거의 모든 레스토랑들마다 우리의 추억이 서려있는 듯했다. 그 말이 정말 맞았다. 우리 참, 열심히도 먹으러 다녔다. 8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 언제 시켰는지 새로 나온 와인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너랑 만나면서 진짜 감동했을 때가 세 번 있었는데, 첫 번 째는 우리 처음 만난 날. 너가 나한테 내 드링크 사겠다고 했을 때야. 나 이때까지 바에 가서 여자들한테 술을 샀으면 샀지 남자한테 먼저 술 산다고 한 여자는 너가 처음이었거든. 이 여자 뭐야, 완전 멋있다 싶었어.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진짜 아팠던 날 너가 나 먹으라고 치킨 수프 끓여 왔을 때. 중학교 때부터 기숙학교(boarding school, 대부분 영국의 좋은 집안 자제들은 사립 기숙학교를 다닌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명문 중/고등학교가 곧 명문대로 이어지는 곳이기에)에 떨어져 나와 산 이후로 난 항상 혼자 살았거든. 우리 엄마 아빠 사이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 매일같이 고성이 오갔던 집에 살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아플 때 누가 뭘 만들어 가져다준 건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 이후 너가 처음이었던 거 같아."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그의 아픈 과거 이야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담담히 말을 이어가는 그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세 번 째는 사실 이건 여러 번에 걸치긴 했는데, 우리가 밥을 먹을 때마다 였어.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과 달리 넌 새 모이만큼 먹고 배부르다 하지 않더라고. 내가 먹는 양 그대로 스테이크 건 치킨이건 입 한 가득 들어차게 썰어서는 너무 맛있다고 싹싹 먹는 데 와, 이 여자 진짜 매력 있다 생각이 드는 거야" 그는 잔에 약간 남은 맥주를 모두 마시더니 직원을 불러 보드카 소다 한 잔을 주문했다. "야, 민망하게 뭘 그런 걸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 참나, 그런 거에 나한테 반했으면 아주 8개월 내내 나한테 빠져 지냈겠구만?" 민망한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했다. "칭찬을 하면 좀 겸손해하라고. 꼭 그런 식으로 거만하게 대답을 해서 이런 감동적인 순간을 깨야겠어? "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로 다시 음식 메뉴로 눈길을 옮겼다. "말은 똑바로 해. 거만함(arrogance)가 아니라 자신감(confidence)라고" 그의 말을 받아치는 나를 보며 그는 싱긋 웃었다.


"비프 버거 패티에 블루치즈 들어간 버거 하나랑 바비큐 폭립도 하나 시키는 거 어때?" 그가 메뉴 중간을 짚으며 나에게 물었다. "장난해? 바비큐 윙이랑 감자튀김도 시켜. 난 소비뇽 블랑 한 잔 더 달라하고" 추가로 음식을 더 주문하자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치는 시늉을 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 사랑에 빠진다. 음식 메뉴판을 보며 무슨 중요한 보고서라도 읽듯 사뭇 진지하게 읽는 모습이라던가,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라던가, 아주 한국적인 예로는 흰 소매를 걷어 부치고 한 손을 조수석 뒤에 올려 멋지게 차를 후진시키는 모습도 있을 수 있겠다. 내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던 내게는 아주 일상적이었던 상황들에서 그는 나에게 감탄을 하고 배력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니 그 상황이 놀라우면서도 갑자기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그를 감탄시키기 위해 내가 얼마나 쓸데없게 예쁜 척 표정을 짓고,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수 백번 옷을 갈아 입고, 실제 이상보다 똑똑한 척하느라 진땀뺐던 것들을 걸 떠올리며.


미식의 도시 홍콩. 매일 같이 새로 열리는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것은 홍콩 살이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브런치 뷔페에서 만난 해산물 플래터(Seafood platter)

" 타코 세트 하나랑, 비프 버거, 바비큐 폭립, 바비큐 윙이랑 감자튀김 주세요" 주문을 받아 적던 직원이 예상보다 너무 많은 주문량에 놀라며 혹시 일행이 또 오냐고 물어봤다. "걱정 말아요. 우린 다 먹고 갈 거예요" 그가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진짜예요. 우린 생각보다 정말 많이 먹거든요"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아참, 혹시 음식에 망고나 캐슈가 들어가나요? 제니퍼는 알레르기가 있어요. 특히 망고는 아주 심해요. 망고를 썰었던 칼이 있다면 꼭 새로 씻고 재료 손질을 해줘요. 다시 말하지만 망고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요"


나이가 들면서 이상한 알레르기들이 생겼는데 바로 망고, 캐슈, 그리고 햇볕 알레르기. 그중 망고 알레르기는 아주 심했다. 한 입만 먹어도 바로 온몸으로 반응이 퍼졌으니. 원래도 이랬었나? 재차 삼차 직원에게 강조를 하는 그를 바라보며 뭔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고마워" 그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콜이 있어. 너가 망고 먹고 병원에 실려가서 그 콜 놓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아무렴 그러시겠지" 그를 바라보며 내 와인잔을 들었다. 그 또한 그의 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혔다.


만남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무겁거나 심각한 내용들 없이 신변잡기에 대한 업데이트의 성격이 강한, 아직까지는 옅은 긴장감이 서려있는, 하지만 즐거웠던 만남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택시 줄에 서서 내 순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택시 올 때까지 기다려 줘?" "아니야 됐어. 이제 사귀는 것도 아닌데. 혼자 갈 수 있어. 내일 아침 콜 있다며. 너도 들어가" "그래 그럼, 메시지 할게" 그렇게 길에서 포옹을 하고는 그는 뒤를 돌아 자신의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 번을 더 안 물어보냐.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도, 역시 나를 잘 알아, 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던 초기 내가 그에게 누누이 하던 말이 있다. 내가 yes라고 했으면 yes 고 no라고 했으면 no라고. 나는 내 진심이 그게 아닌데 남 눈치 때문에, 또는 내숭을 떠느라 안 그런 척, 아닌 척, 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그냥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고 내가 하는 말을 존중하라고.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주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 절대로 반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이나 가고 싶어 하는 자리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호의를 제안했을 때 내가 거절할 경우 정말 괜찮냐며 재차 물어오지도 않았다 - 참고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의미 없는 밀당이라던가 내숭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데 그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모처럼 정말 즐거운 저녁이었어.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만나서 저녁 먹는 거 어때? 요즘 내가 출장 때문에 많이 바빠서 홍콩에 거의 없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이라.. 헤어진 연인들이 이렇게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아 집으로 가 그대로 씻고 일단 잠에 들었다. 까짓 껏, 한 달에 한 번인데. 괜찮지 않을까. 정신없이 기계처럼 씻고 준비하는 나날들과 달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할지부터 떠올랐다. 이렇게 눈을 뜨자마자 고민이 된다는 건 나도 어느 정도 그의 말에 동의를 한다는 거 아닐까.


'그래 좋아. 그런데, 우리 그냥 저녁만 먹는 거 맞지...? 우리 둘에게 혼란스러운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후다닥 샤워부스에 들어갔다.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막 시작하려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대답 일찍도 하네. 알았어. 다음 달에 어디 가서 먹을지 리스트 정리해서 이번 주 안에 보낼게. 콜 들어가야 돼. 이따가 얘기해' 딱 그 다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옛날 영국 오빠와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푸켓 카말라 비치의 비치 클럽, HQ beach Club.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가슴 트이는 풍경. 그립다 정말

내 우려와는 달리 한 달에 한 번씩 이뤄진 그와의 저녁식사는 별 탈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처음 두세 번, 그러니까 두세 달 간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등에 대한 안부 정도만 나눴다. 네 달 째부터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들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했을 때에 대한 이야기와 그간 하지 않았던 과거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함께.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왜 그렇게 사람들에 대한, 특히 여자들에 대한 불신이 있는지, 왜 항상 모든 행동들에 대해 의심하게 까탈스럽게 구는 삶을 사는지, 왜 자신을 그렇게 항상 푸시하는지에 대해서도.


나도 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홍콩에 오게 되었는지, 그때 약혼자와 파혼을 했었을 때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내 힘듦을 한낯 가십거리처럼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래서 겉으로는 밝은 척 하지만 사실 한 사람을 믿고 나 자신을 오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아마도 이미 우리가 과거의 연인이었기에,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패를 모두 꺼내 보이고 전적으로 의존했던 사이었었기에 이런 솔직한 대화들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가끔 아직도 심장을 후벼 파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던 나날의 이야기들까지, 감정적이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I sometimes think, we forced ourselves to be together at that time as we were so lonely, when we were actually meant to be the best friend instead (나 가끔 생각하는데, 우리는 어쩌면 그때 너무 외로웠어서 서로가 연인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밀어붙였던 게 아닐까, 사실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가 될 운명이었었는데 말이야)"


방금 나온 생참치 롤 위의 성게알을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다음 달 그와 만난 곳은 홍콩에서 꽤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센트럴에 위치한 미슐랭 원 스타 스시야였다. 어느 정도 시켜야 배가 찰지 몰라 우선 셰프 오마카세를 시키고 모자라면 그중에 맛있었던 것들을 더 시키기로 했다. 둘 다 사케를 마시는 날이면 다음 날 숙취가 심해 힘들어하는 스타일이었기에 대신 그가 좋아하는 샴페인 한 병 또한 함께 주문했다.


"I agree, by the way, can you please take my uni away? Seriously, it look so disgusting(나도 동의해, 근데 너 내 성게알 좀 가져갈래? 완전 구역질 나게 생겼어)" 그는 내 말을 듣는 중 마는 둥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참나, 성게알도 못 먹으면서 무슨 미식 가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빨리 그의 롤 위에 있는 성게알을 싹 걷어내 내 초밥 위에 얹었다. "망고 안 먹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야, 말은 똑바로 해, 난 망고를 안 먹는 게 아니라, 알레르기 때문에 '못' 먹는 거라고!" 그를 톡 쏘아붙였다. "알았어 알았어. 망고를 '안' 먹는 게 아닌 '못' 먹는 내 베스트 프렌드를 위하여" 눈 앞에 그가 들어 올린 샴페인 잔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베스트 프렌드를 위하여" 못 이기는 척 그의 잔에 내 잔을 부딪혔다.


HQ beach club의 정말 맛있는 블러디 매리! 원래는 보드카가 들어가야 진짜 블러디 매리지만 나름 건강해보고자 버진(virgin, 무알콜)으로 주문했다

"지금 마시는 와인으로 한 잔 더 드릴까요?" 하얀 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직원이 와 나에게 물었다. "아니요, 머리가 좀 아프네요. 혹시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있나요? 술 없이 버진(virgin)으로요" "물론이죠,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블러디 메리: 토마토 주스가 베이스가 되는 새콤 매콤한 칵테일. 주로 브런치와 함께 대낮에 즐기는 칵테일이다


바, 썬베드, 테이블, 의자, 모든 것이 라탄, 그리고 흰색과 베이비 블루로 이뤄진 비치 클럽에서는 지나간 2000년대 초의 팝 뮤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년 여름쯤 유행했던 노래 같은데 벌써 20년 전 노래라니.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 마음만은 20대라는 말이 점점 공감이 가는 어엿 30대 중반의 나는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썬베드에 앉아 챙겨 온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실제로는 오히려 주위 경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머무르고 있는 호텔과 가까운 카말라(Kamala) 공용 해변을 몇 번 이용을 한 후 난 이후, 공용 해변보다는 차라리 돈을 좀 더 내더라도 비치 클럽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썬베드 값, 타월 값, 음식 값 등등 모든 서비스 이용료를 따로 받는 공용 해변을 생각해 볼 때 -심지어 시설도 좋지가 않다 - 와인 한 잔만 마셔도 그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고 스타일리시하고 깨끗한 화장실과 직원들의 세련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치 클럽이 훨씬 더 똑똑한 결정이었다. 물론, 온종일 있으니 와인 한 잔만 마실리는 없고, 이것 저것 음식을 주문한다고 해도 사실 태국 바트로 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나는 거지, 한화로는 공용 해변에 비해 하루에 2~3만 원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낮 1시가 조금 넘었다. 아까 10시쯤 왔으니 벌써 3시간이나 머물렀다는 건가. 점심 때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허기가 들기 시작했다. 아직 성수기라 부르기 이른 11월이라 나를 포함하여 손님이 몇 없어서 그런지 주문한 지 얼마 안되 주문한 블러디 메리가 도착을 했다. "여기 버진(virgin, 무알콜) 블러디 메리입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나요?" "네 있어요. 음식 메뉴 좀 가져다 줄래요?" "당연하죠. 사실 옆에 놓인 아이패드에서 고르시면 돼요. 다음 장에 음식 메뉴가 있거든요" 밀짚모자를 쓴 직원은 함박웃음과 함께 내 썬베드 옆 탁자에 놓여 있던 아이패드를 가리켰다. "어머, 옆에 두고 전혀 몰랐네요. 벌써부터 이렇게 가끔 테크놀로지에 못 따라갈 때가 있다니까요? 금방 고를게요, 잠깐만 기다려줘요" 음료 메뉴 바로 옆의 음식 메뉴를 클릭하자 곧 음식 사진들이 주르륵 떴다. 익숙한 메뉴들이 더러 보였다. "눈에 익는 메뉴들이 있네요" "아 이 전에 저희 비치 클럽에 오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4년 전쯤 왔어요. 그때 남자 친구랑 생선구이 하나, 왕새우구이, 스테이크 뭐 이렇게 시켜 먹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 메뉴들이 있나요? 그때 먹었던 것들 중에 하나 골라서 먹고 싶은데"


"뭘 골라서 먹어, 다 시키면 되지."


반대편에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땀에 살짝 젖은 셔츠를 입은 R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크림은 왜 까먹고 안 가져오고 난리야. 내꺼 가져오긴 했는데 너가 쓰는 그런 여성적인(girly) 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아둬" 더위에 짜증이 났는지 그는 내쪽으로 선크림을 성의 없게 던지며 말했다. "나이 들었나 봐, 자꾸 까먹네." 그에게 선크림을 받아 들고는 뚜껑을 열어 왼손에 쭈욱 짰다. 햇볕 알레르기. 망고 알레르기와 더불어 정말 짜증 나는 알레르기다. 둘 다 좋아하면서도 몸에 안 받아 즐길 수 없는 것 까지 매우!


이미 벌겋게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한 오른쪽 종아리 부분 선크림을 아주 듬뿍 발랐다. "그럼 저 세 개 시키고 음료는 뭘로 할 거야?" 어느덧 내 손에서 아이패드를 뺏어 음식 메뉴들을 넘기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자 햇볕이 그대로 눈에 들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 야, 너 그럼 이마에 주름 생겨. 근데 아침부터 술이야?" 내 버진 블러디 메리를 흘깃 보더니 그가 내 이마를 톡 치며 물었다. "버진이거든. 그리고 휴가 기간인데 아침부터 마심 또 어때" "그건 또 그렇네. 근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천하의 알코홀릭 제니퍼가 휴가지에서 버진이라니. 난 일단 커피로 시작할게. 스파클링 워터 큰 거 한 병이랑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더워 죽겠는데 왠 뜨거운 커피?" "난 유럽 사람이잖아. 우린 차가운 커피 안 마셔" 손에 들고 온 작은 스포츠 가방을 내 썬베드 옆에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너네 이제 유럽 아니거든? 유럽 사람인척 하고 싶어도 이미 늦었어. 멍청한 보리스(영국의 총리)가 일을 다 망쳐버렸잖아." " Haha, that's fair point (맞는 말인데?)" 그가 너털 하게 웃었다.


영국 오빠의 페이버릿 샴페인, 루이 나트 블랑 대 블랑스 (Ruinart blanc de blancs). 어찌나 자주 마셨었는지 이 이름만 보면 자동적으로 옛날 영국 오빠가 떠오른

"참! 우리 싸우는 거 아니에요" 그가 갑자기 예의 바른 미소를 짓더니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샴페인도 한 병 줄래요? 어떤 것들이 있죠? 혹시 루이 나트 블랑 데 블랑스(Ruinart blanc-de-blancs)도 있나요?" 한 손은 이마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고 한 손은 열심히 아이패드를 넘기며 그가 물었다. "태국에서 루이 나트 파는데 아마 없을걸? 좀 대중적인 거 시켜. 모엣 샹동(Moët & Chandon) 있죠?" 직원에게 물었다. "네 물론입니다. 음식과 함께 한 병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그를 잡아먹을 것이라도 한 듯 직원은 재 빨리 아이패드를 받아 들고는 주문을 다시 확인한 뒤 키친으로 종종거리며 걸어갔다.


"여기 얼마나 많이 붙여 파는지 알아? 웬 샴페인이래? 그냥 아무 와인이나 마시지" 직원이 가자마자 그에게 핀잔을 주듯이 이야기를 했다. "너 일 그만두고 처음 만난 자린데 당연히 샴페인으로 축하를 해야지. 그리고 어차피 계산은 내가 할 텐데 무슨 걱정이야? 내 생일 때 빼고 내가 너랑 밥 먹으면서 한 번이라도 너한테 계산하게 한 적 있어? 넌 이제 백수지만 난 아직 돈을 번다고, 그것도 아주 잘" R은 얄밉게 웃어 보이며 내 옆 썬베드에 누웠다. "그래서, 뭐 어떻게 지낸 거야? 너 홍콩 떠나고 바로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 회사 내부에 구조조정이 있어서 그거 때문에 머리 아파서 연락을 못했어. 나 이 휴가에서 돌아가고 나면 싱가포르 오피스에 있는 직원 20명이나 잘라야 돼. 한 팀이 통째로 없어진다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근데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뷰는 정말 여기 비치 클럽이 최고야. 나 여기서 보니 엄청 좋지 않아?" 대답한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다다다다 말문의 포문을 여는 그를 보니 너무나도 반가워 꽉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연히 너무 좋지. 하마터면 선크림도 없이 완전 익어버릴 뻔했는데. 처음에 가져다 달라고 할 때 까먹으면 못 가져간다고, 휴양지 가면서 선크림 하나 안 챙겼냐고 그렇게 타박을 해놓고 은근히 시키는 거 다 한다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더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푸켓에 왔다. 나의 밥 잘 사 주는 옛날 영국 오빠.


그가 왔다. 푸켓에. 나의 멘토, 나의 eating partner, 밥 잘 사 주는 옛날 영국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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