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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우 May 14. 2024

택배기사님과 갑을 계약서가 아닌 동행계약서를 쓰렵니다.

경비원 아저씨와의 안타까운 이별을 겪고 난 후

책 편식이 심한 나는 독서량의 80%를 에세이로 채운다. 

나머지는 흠.. 10%가 만화책, 10%가 자기계발서쯤 되겠다.


도서관에 가면 늘 신간코너를 먼저 싹 돌고 책 투어를 시작하는데, 

이번에 김제동 씨가 쓴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원래 김제동의 말재간을 좋아하는 데다 책의 삽화 또한 정말 애정하는 '설찌 작가'가 그렸지 뭔가.

망설임 없이 당장 빌렸다.


당직날 읽으려고 아껴두었다 펼친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책.

역시나 참 따스했고 꽤나 유쾌했고 동시에 위로가 많이 되었다.


많은 챕터가 인상 깊었지만「갑을 계약서 말고 동행계약서」라는 챕터가 내 마음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챕터를 읽고 나서 내 안에서도 끊임없는 이야기보따리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서울 성북구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과 계약을 맺으면서

'갑을(甲乙) 계약서'가 아닌 '동행(同幸) 계약서'를 썼다고 한다.

 


본디 동행(同行)이란 단어는 한자로 '함께 걷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계약서는 동행의 '행 行'자를 '행복할 행 幸'자로 바꿔서 작성했다고 한다.

함께 걷기도 하지만, '더불어 행복하자'는 의미로 말이다.


이따금 뉴스에 보도되곤 하는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횡포가 우리 아파트에서는 없도록 하자,

경비원, 미화원도 우리 아파트의 가족이다'라는 의미로 말이다.



와.. 가슴이 얼마나 따스해지던지.



몇 년 전「우리 동네 고마운 분 인터뷰하기」라는 주제로 아이의 초등학교 과제가 있었다. 

아이와 나는 경비원 아저씨를 인터뷰하기로 하고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보통 경비원들은 2명이 교대 근무를 서시는데, 그중 한 분이 정말로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다.

내심 '제발 그분이었으면..'하고 문을 열었는데 우와, 정말로 우리 가족이 참 애정하던 그분이셨다.


아이 학교과제 수행임을 말씀드리고 경비원 아저씨께 이런저런 질문을 드렸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셨는데,

 가슴 벅찬 순간들이 있나요?"


아저씨가 "많지요"라고 운을 띄우며 답하신다.

"동네 주민분들이 고생이 많다고 인사를 건넬 때,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실 때 등 

 사람 간에 따뜻한 순간이 오갈 때 벅찬 마음이 듭니다"



"와~ 그렇군요!"

"반대로 속상한 경우도 종종 있으 실 테지요?"


"하.... 그건 A4 10장 분량을 말해도 모자랍니다..

 뭐가 있냐 하면은!!" 하며 입을 여시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셨다.


"...... 아닙니다. 그건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라며

이내 말을 아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당장 인터뷰 종이를 거두고

"에구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 힘든 순간이 많으셨죠? 얼마나 속상하셨어요.."라며

대책 없는 위로라도 해드렸을 텐데

그때는 그저 '아고.........' 하는 짧은 탄식만 들려드리고 인터뷰를 마쳤다.


/


회사 발령으로 인해 평일엔 타지에 있다가 주말에만 집에 오던 어느 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있던 내게 경비원 아저씨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제 얼굴 뵙는 것도 며칠 안 남았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2년 다 됐다고 그만두라 하네요............."


"아.... 어째....  

 아.... 어떡해요...."


이번에도 역시 난 안타까운 탄식 말고는 그에게 건넨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찾은 아파트.

그의 슬픈 예고대로 경비원 아저씨는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현재도 아파트 1층에 살지만

어린 시절에도 아파트 1층에 살았다.

그 시절엔 죄다 복도식 아파트였고, 동 마다 경비실이 있었기에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할 때마다 '경비실 아저씨 드리고 오너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아, 귀찮은데'를 외치면서 음식 접시를 날랐고

그때마다 경비원 아저씨의 함박웃음을 선물로 돌려받았다.


그때 그 시절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김제동 씨의 책에서 동행계약서 부분을 읽다

각종 기억들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음식을 배달하던 꼬맹이 시절에서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경비실이 아파트 단지 입구 쪽에만 위치해 있는 까닭에

택배를 찾을 때가 아니라면 경비원 아저씨와 이야기 나눌 기회도 없고

끈끈한 관계를 맺을 일 또한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워져 왔다.


먹먹한 마음이 가득할 그때 즈음,

회사 당직실로 택배 아저씨가 배달을 왔다.


문득, '경비원 아저씨하고만 동행계약서를 맺으란 법 있나,

나는 택배 아저씨하고 동행계약서를 맺으련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작은 택배 박스 하나를 배달하기 위해

굽이굽이 길을 넘어오신 택배 기사님께 커피 한잔을 권했다.

"기사님, 커피 한잔하고 가세요.

 아메리카노가 좋으세요, 믹스커피가 좋으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믹스커피로 한잔 부탁합니다."


뜨끈하고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잔 건네받은 아저씨는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았다.

"관사 A동이 어디고 B동이 어디예요? 헷갈리네..

 아, 내가 이번에 택배사를 옮겼어요.

기존에는 한진택배를 했는데, 물량이 적어서 후배한테 넘겨주고

나는 요새 쿠팡 전문으로 갈아탔습니다.


원래도 택배 일을 했는데 몸이 아파서 10년 정도 쉬다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택배일을 하게 되었네요. 허허허"


"그러셨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리액션을 했다.

더 이상 탄식만을 건네는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커피 한잔을 쭈욱 들이키고 뒤돌아서는 아저씨 손에

과자를 몇 개를 쥐어드리고 안녕을 고했다.


부웅. 

떠나가는 택배차를 보며 읊조렸다.

"아저씨. 우리도 이제 동행(同幸) 계약서 맺은 겁니다.

 앞으로 더불어 행복합시다."


김제동 오라버니 덕에 나 또한 동행계약서를 맺은 벅찬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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