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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09. 2023

애들이라는 말

애들 어렸을 때

애들 집에 있어서

애들이 그걸 다 먹는다고?

애들이 좋아하니까

애들이 웃는 소리, 떠도는 소리, 뛰노는 소리...


'애들'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렇게 행복했었다. 우리 집에 애들이 있어서 그렇게 행복했었다.


전에는 '애들'이라고 말하던 그 자리에 이제는 애들 대신 '딸'이 들어간다. '애들이 어렸을 때' 대신에 '딸이 어렸을 때'라고 말하고, '애들이랑 가봤다'라고 말하는 대신 '딸이랑 가봤다고'라고 말한다. 그때마다 가슴이 옥죄고 목이 멘다. 그 시점에 아들도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얼굴이 함께 어두워지기도 한다.


다행인 건 '애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주 없진 않다는 거다. 우리 집에 딸 친구들이 놀러 올 때, 딸과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갈 때처럼 그 '애들'이라는 소중한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젯밤에도 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자고 아침까지 먹고 놀다가 돌아갔다. 아침에 부엌에 들어가니 애들이 라면 끓여 먹은 냄비가 싱크대에 들어있고 오후에 코스트코에서 잔뜩 장을 봐놓았는데 애들이 하나둘 빼먹은 흔적이 남아있다. 세 개 들이 프로슈토 햄도 두 개만 남았고, 세 개 들이 치즈 스프레더도 두 개만 남았고, 바게트 빵도 반만 남았다. Wii를 가지고 깔깔 웃으며 노는 소리가 밤늦게까지 들리더니 애들이 한밤중에 출출했나 보다.


나에게 애들이라는 말은 지난 행복의 잔상일 뿐 아니라 딸 곁에 누군가 있어서 그 애가 덜 외로울 거라는 현재 시제의 안도를 담은 단어이다. 아직 내가 사랑할 대상이 많다는 느낌도 위로가 된다. 사실 이 단어를 쓰는 건 공짜가 아니다. 1층에 손님방이 따로 있어서 친구들이 놀러 오기 좋은 집에 살기 위해 월세가 더 비싼 집에 살고 있다. 반조리 식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재료만 사서 조리하는 음식보다 비싸긴 하지만,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애들이 뚝딱 만들어 먹기 좋은 반조리 식품을 냉장고에 늘 챙겨둔다. 친구들이 언제 들이닥쳐도 딸이 창피해하지 않을 만큼 집안도 늘 정리해 둔다. 애들이 1층을 점령할 때는 슬며시 2층 안방에 들어가 갇히는 걸 감수해 준다. 딸이 친구 가족의 여행에 따라갈 때는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마음과 신세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꾹 누르고 보내준다. 우리 가족의 여행길에도 딸 친구를 초대하고 여행 비용까지 부담하기도 하고, 보호자가 필요한 학생들 활동에 따라가기도 한다. 쓰고 보니 자화자찬이어서 민망하네. 타고난 성품이 훌륭치 않다 보니 이만큼 하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니까 애쓰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딸이 애들 속에 있는 것이, 내가 애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런 대가와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나에게 중요하다. 애들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입장에 있는 한, 낯선 땅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도 편히 눈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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