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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ark

by 글벗

프롤로그


낯선 언어의 단어는 철자나 소리로 표현되는 음운을 넘어서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익숙한 언어로 단어를 접할 때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나 생소한 화초를 알아갈 때 느끼는 설렘과 비슷하기도 하고, 어떤 사물의 이면을 무심코 보았을 때 느끼는 생경함 같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접하지만 영원히 낯선 언어, 영어. 미국에 십수 년을 살고 수백 건의 계약서와 소송 문서를 번역했지만 여전히 영어로 말하려면 긴장되며 신경을 곤두세워야 내용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좋은 점은 아직도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훅 일으키는 단어들이 있다는 거다. 반복되는 말들로 일상의 공기가 지겨울 때, 낯선 언어를 입에 굴려봐도 좋겠다.


첫 단어_Embark


딸이 어릴 때 작은 사립학교에 딸린 유치원에 다녔다. 루터교단의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가장 어린 학년은 3세에서 5세 아이들이 다니는 프리스쿨인데 한국의 유치원 과정쯤 되었고 가장 높은 학년은 중학교 3학년 과정인 8학년이었다. 입학식이나 주요 절기에는 100명 남짓한 전교생이 모두 교회 예배당에 모여서 공연이나 행사에 참여했다. 그런 날,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학생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대체로 열정이 있지만 차분하고,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분위기였다.


딸이 속했던 4세 반 보조 선생님은 밝은 브라운 피부의 흑인 여성이었다. 처음 엄마와 떨어져 학교에 가는 딸은 죽어라 하고 울어댔는데, 이 보조 선생님은 아침마다 딸을 꼭 안아주며 맞이했다. 한두 달 동안은 오후에 데리러 갈 때까지 울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딸에게서 이 선생님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내내 품에 안고 있었다는 걸 그렇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딸은 유치원에 잘 적응하여,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고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이 5세 반으로 올라가서 보조 선생님은 환한 미소가 매력적인 따뜻한 사람이라는 기억으로만 남은 어느 날, 학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학교 전체 학부모들에게 발송되었는데 이 보조 선생님이 쓴 편지였다. 십여 년 전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이랬다.


자신은 약혼자를 굳게 믿은 나머지 결혼 전에 아이를 임신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약혼자가 마음이 돌변하여 결혼 생활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않겠다고 하기에, 약혼자와 파혼하게 되었다. 자신은 미혼모로서 아이를 낳아서 기를 것이다. 혼전 임신을 하고 미혼모가 된 자신을 학부모들이 너그럽게 용서하고, 미혼모로서 힘든 길에 들어서는(Embark on) 자신을 격려해 주기를 부탁한다.


편지를 읽고, 미국 사회의 보수성이 놀라운 한편, 그 선생님의 당당함이 존경스러웠다. 수년 간 교제한 약혼자와 파혼하고 미혼모가 된 사실이 과연 죽을죄를 지은 듯이 사과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혼전 임신을 용납 못하는 보수적인 학부모에게 겸허히 사죄하고 뱃속의 아기를 위해 일자리를 지키는 선생님의 태도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미혼모라는 어려운 길에 들어선다는 문장에서 쓰인 단어, "Embark". 사전에는 배에 승선한다는 의미가 가장 처음 나온다. 삶의 행로가 예기치 않게 바뀌면 친숙한 땅을 떠나서 고난이 예고된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도망치지 않고 비장하면서 담담히 배에 오르는 모습을 그 "Embark"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다.


영원히 낯선 언어, 영어에서 만나는 신박한 단어들을 이 매거진에서 열심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I embark on this new magazine with the curiosity of a perpetual beginner, finding wonder in words that remain forever fo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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