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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Oct 22. 2023

다섯 번째 시월을 보내며

다섯 번째 시월이 되었다. 네 번째 시월부터 다섯 번째 시월 사이의 거리는 좀 더 짧아졌지만 시월이 되자 시간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올해는 시월이 금방 지나가겠구나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표면이 매끄럽게 굴러가는 바퀴가 아니라 얄팍한 마음에 철턱철턱 달라붙어 구를 때마다 생채기를 내는 바퀴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데 천천히 지나가줘서 고맙다.


블록을 맞추며 땀을 뻘뻘 흘리던 아들의 모습, 고개를 떨구고 길을 걷던 모습, 장난을 치고 해맑게 웃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고맙다. 참을 수 없이 그리워서 몸이 오그라들 것 같지만,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날도 많지만, 슬프고 절망적인 기분은 아니다. 마음이 참 이쁜 아이가 나의 아들이었으니까. 나는 하늘의 영혼을 가진 아이를 길러본 행운의 엄마니까. 그 영혼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이 크더라도 함께한 시간은 행운이었다.


시월만큼은 그 아이를 실컷 기억하고 싶었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서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은 이들을 기억하는 걷기 행사가 있어서 참여했다. 애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Kara 라는 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Walk and Run to Remember"이라는 표제가 붙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전혀 다른 배경을 가졌을 법한 이들에게 공통점이란 너무 빨리 떠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뿐이다. 딸의 얼굴을 그린 티셔츠를 입어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딸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저 작은 제사를 올리듯 걸으러 온 사람들이다.


내내 눈물을 훔치다가 씩씩하게 3Km 코스를 뛴 여성은 1등으로 들어와 작은 상을 받았다. 누구를 기억하면서 뛰었나요, 사회자가 묻자, 2년 전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억하며 뛰었다고 윗입술을 잔뜩 깨물며 대답했다. 손을 꼭 잡고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걸은 젊은 부부가 보였다. 두 사람의 걸음과 몸짓에서는 누가 누구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무게의 슬픔이 배어 나왔다. 한 아버지와 청소년 아들 둘이 함께 걷는 팀에도 시선이 갔다. 가족에서 빠진 조각을 그리워하는 아픔이 보였다. 나는 남편이 함께 걷고 싶지 않다고 해서 딸과 둘이 걸었다. 딸은, 사람들이 우릴 보면 아빠를 잃은 가족인 줄 알겠다, 라면서 농담을 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웃음에는 그늘이 있었고 걸음은 묵직했다. 누군가 나와 딸을 지켜봤다면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다. 가끔 눈물을 훔쳐도 모두 이해하는 자리, 기억하고 싶지만 말로 꺼낼 수 없는 기억을 존중해 주는 자리. 그 자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생소한 종류의 편안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일어나는 이별은 꼼짝없이 묶여있는 "존재"에게 가하는 사정없는 매질이며 어떠한 구원의 은총도 보이지 않는 형벌 같은 거였다. 그 형벌은 완벽해서 그 순간에 어떤 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더 상처를 받거나 위로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이들이 모두 그 아픔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편안함이지 싶다. 걷는 동안 딸과 내가 동네 아이들 이야기도 하고,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골목 풍경 이야기도 나누는 동안 어쩌면 아들을 보이지 않는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행사에는 Fur Friends(털북숭이 친구들)이라는 모임에서는 치료견 수련을 마친 반려견들을 데려와서 그 자리에 웃음과 따뜻함을 더했다. 또 여러 관련 단체들이 부스를 설치하여 애도와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나누어주었다. 자료를 받아서 읽고 더러는 수긍이 가고 더러는 더 큰 의문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경험, 내 이야기를 대표(Represent)하는 이야기를 사회에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살 사별자로서,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로서의 이별 경험은 독특하고 고유하면서도, 사별이라는, 자살이라는, 역경이라는 보편성을 함께 지닌다. 역경을 만나 혼란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그 역경을 들려줄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동안 덮어놓았던 내 이야기를 언젠가 다시 꺼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요즘 대학 원서 쓰느라 마음의 부담이 클 텐데 딸이 선뜻 나와 함께 걸어주어서 마음이 찡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인생의 시점과 같은 지점에 서있으니 지금 마음의 무게는 말도 못 할 거다. 오늘 우리를 보고 오빠가 뭐라 그럴까? 물었더니 시큰둥하게 "Whatever" 그럴 거 같다고 했다. 딸과 나는 진짜 그럴 거 같다면서 한바탕 웃었다. 아들이 뭐라고 하거나 오늘 걷기에 참여한 일은 우리 자신을 위해 정말 유익했다고 둘이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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