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 걸 감옥에 끌려가는 것만큼 싫어하는 나를 끌어내야 했다.
나이 들수록 움직여야 한대, 걷는 게 허리에 좋대, 몸을 움직이는 게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대...
온갖 정당한 대명제들에도 나는 운동이라면 예외 없이 손사래를 쳤다. 몇 년에 한 번씩 주위에 걷기를 좋아하는 이웃이 있으면, 약속 어기는 거는 더욱 싫어하니까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걸은 적은 있었다. 가까이에 사는 지인이 없는 지금은 쓸 수 없는 유인책이다.
다행히 당근이 하나 나타났다. 오디오북이다. 나는 요약보다는 책 한 권을 완독 해주는 오디오북을 선호하는데, 한 권 완독에 짧게는 대여섯 시간, 길게는 스무 시간 남짓 걸린다. 글자로 읽는 것보다 대체로 두 배 정도 더 걸리지만 걸으면서 듣는 오디오북에는 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움직이면서 들으니까 졸리지 않고 귀에 더 쏙쏙 들어오기도 하고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걷기 때문에 접하는 도서의 분량이 저절로 확보된다. 영어 오디오북의 경우 책으로 읽으면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랐던 단어의 발음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은 덤이다. 때로는 영어로 들은 오디오북의 텍스트 버전을 구입하거나 빌려보거나 거꾸로 텍스트로 먼저 접한 책을 오디오북으로 듣기도 한다. 단, 어려운 단어가 많이 나오는 논픽션은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비교적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은 것 같다. 오디오북과 함께 산책한 지 이제 어느덧 두 달 반쯤 되었다. 애개? 하지만 내가 일주일 이상 걸은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바쁘거나 비가 와서 못 걷는 날이 있으면 이대로 산책을 그만두게 될까 봐 다음 날은 열일 제쳐놓고 산책부터 시작할 정도로 매일 기대하는 일과가 되었다.
오디오북 듣는 기쁨으로 시작한 산책에 이제는 새로운 유인이 생겼다. 산책 중에 만난 마을을 사진에 담
는 일, 사진에 담은 장면을 스케치로 옮기는 일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산책을 시작하여 가을의 끝자락을 보내는 요즘, 동네 골목골목 가을의 정취를 원 없이 즐기고 있다. 귀에는 가벼운 이야기가 흘러나오니까 잠깐씩 멈추어 사진을 찍느라 몇 장면을 놓쳐도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아주 오래전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내가 관심 있던 분야는 해결중심 단기치료였다. 다른 정신상담 분야에서 다루는 프로이트 정신분석도 배우지만 해결중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작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있다. 사실은 다 잊고 살았다. 결혼한 뒤에는 남편과 한바탕 싸울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읽힐까 봐(난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단호한 방어 태세를 취하는 남편 앞에서 내가 배운 지식의 무능함에 실망했고 그런 무능한 지식 따위는 잊고 싶었다. 아이를 잃은 후에는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동원하여 과거에 써댔던 글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잊고 싶고 잊었던 지식. 그런데 오디오북이라는 당근을 따라 팔랑팔랑 걸으러 나가는 자신을 보면서 무슨 일인지 기적 질문이 떠올랐다. 기적 질문은 해결중심 단기치료에서 아주 중요한 기법이다.
오늘 상담을 마치면 오후에 뭐 할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다음에는요?
네, 그러면 밤에는 자겠죠?
제가 아주 이상한 질문을 하나 할게요.
아주 이상하더라도 웃지 말아요.
그러니까...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눈을 떴어요.
아주 잘 자서 개운해요.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당신이 푹 자는 동안 기적이 일어나서 당신이 상담을 받는 이 골치 아픈 문제가 사라진다면...
네, 기적이 일어나서 문제가 사라진다면...
그러면...
그러면...
기적이 일어났다는 걸,
당신은 뭘 보고,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그 기적을 위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아주아주 작은 변화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적을 만들기 위하여 과거를 들춰낼 필요도, 내면을 휘저을 필요도 없다.
아주 조그만 걸 바꿀 게 없을까?
여느 중년 여인만큼 노화를 겪으면서도, 방심하면 우울에 눌리면서도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이는 일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나를 움직인 건 우습도록 간단한 오디오북이었다. 아주아주 작은 변화였다. 기적질문을 떠올리고 오디오북을 생각해 낸 건 아니다. 거리에서 뛰거나 걷는 사람들이 모두 뭐를 들으면서 다니는 걸 보고 나도 따라한 것뿐이다. 산책하면서 오디오북 듣기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두 달 걸으면서 극심한 허리 통증이 사라졌고, 기분도 나아졌고, 변화하는 계절의 아름다움도 포착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백 가지 기적 중 작은 기적의 단초이다.
먼 일은 모르겠지만, 옛날 일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