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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Dec 10. 2023

사라지는 직업인의 회상

나는 번역을 한다. 도서 번역이 아니고 기술 번역이다. 워드프로세서가 보급되면서 사라진 타자수처럼 날로 총명해지는 AI에게 자리를 내어줄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번역가의 언어감각과 창의성의 역할이 큰 도서 번역이라면 당분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기술 번역은 좀 다르다. 문장 구조의 규칙성이 높고 문장의 품질보다는 정확성이 우선이어서 번역하는 사람의 언어 실력에 크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주요 분야는 기술번역 중에서도 소송과 로컬라이제이션인데 이 분야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경력이 늘면서 일감의 단위가 더 커지다 보니 전체 번역하는 분량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단,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는 타이핑하는 속도로 번역할 수 있는(타이핑이 좀 느리다) 일감도 많았는데 그런 만만한 일감이 사라진 지는 한참 되었다.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구글번역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는 기계번역을 해놓고 번역가에게 문장 정리를 의뢰하는 형식의 일감이 등장했다. 모 에이전시의 번역가용 플랫폼에는 아예 기계 번역기가 통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픈 AI가 나오기 전까지 기계번역은 그리 쓸만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번역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하고 기계가 해놓은 뒤처리하는 것도 기분이 별로여서 나는 기계번역 후 검토 작업은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급속도로 똑똑해지는 AI를 보면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이중언어 구사자도, 영어 전공자도, 유학파도 아니어서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며 번역하느라 힘들었다. 분량이 큰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두뇌의 번아웃을 느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기도 했다. 내가 하는 프로젝트의 대부분이 엄격한 기밀유지를 요하기 때문에 상의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번역은 참 보람된 일이다.

단어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옮겨 담는 일, 문장을 꼭꼭 씹어서 음미하는 일, 구김이 가고 엉성한 문장을 잘 다림질해서 옮기는 일이다. 내 생각이 아닌 문장을 쓴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세상의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마지막 대목에 가장 끌렸다.


너무도 불공정해 보이는 계약서를 번역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도 계약서를 작성한 측의 입장이 보이기도 했다. 특허 장사하는 로펌이 우리나라 기업을 공격하는 소장이나 한국 기업의 미국 법인이 궁지에 몰린 문서를 번역할 때는 애국심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내가 몰랐던 산업 분야의 거래 관행, 규정 준수 문제, 수익 다각화, 유통 분쟁, 금융 사기 등 다양한 사안에서 양쪽 국가의 상이한 법적 원리, 경제적, 사회적 체계에 맞는 용어를 찾아 쓰느라 애를 먹었지만 세상을 조금은 더 잘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문서들은 번역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AI의 힘으로 순식간에 번역될 거다. 번역 결과물은 사람이 한 번역보다 더 정확하고 오류가 적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그 중간에서 생산자 역할을 할 기회를 잃는다는 사실이 허전하다.


기술 발전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은 한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허전함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타자수들도 타자를 치며 문서를 재미있게 읽던 기회를 빼앗긴 게 아쉬웠을 것 같다. 사람들은 타자보다 더 깨끗한 문서를 읽게 되었지만 종이에 적힌 내용에서 더 소외되지 않았을까? 양초의 심지를 손으로 꼬아 만들어서 성냥으로 불을 붙이던 시절에는 그 작은 불빛이 더 감사하지 않았을까? 전구를 사고 스위치를 올리는 사람은 그런 경험의 기회를 빼앗긴 게 아닐까?


실체를 생산하는 경험을 할 기회가 자꾸 줄어드니까 돈을 쓰면서 경험하는 산업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삶, 또는 실체에 밀착되어 있으면 사실 일하면서 깨닫고 느끼는 것이 크다. 다른 말로 보람이 크다. 일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은 많지 않아도 사람에게는 무언가 경험에서 만족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도 가고, 체험도 찾아서 하고, 봉사도 하는 건 아닌지.


모 게임회사 회의 시간에 한 직원이 사장에게 물었다.

내년에는 경기가 더욱 후퇴할 전망인데 우리 회사는 괜찮을까요?

사장이 답했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 일자리를 잃은 뒤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죠. 우리 회사는 앞날이 밝습니다.


이래서 귀농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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