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에나는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구입한 새 차였다.
거의 십육 년 전, 두 달 정도 먼저 미국에 가 있던 남편이 방금 뽑은 시에나를 몰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우리를 마중 나왔다. 내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보다 시에나의 모습이 더 생경하고 설랬다. 공항에 착륙할 때 느꼈던 미국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은 큼직하고 광택이 주르르 흐르고 널찍한 차에 올라타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대체되었다.
그전까지 우리 부부는 늘 적당히 연식이 된 중고차를 구입해서 더 몰기 불안해질 때까지 몰았다.
청승맞은 우리 집 자동차 역사는 백삼십만 원쯤 주고 구입한 파란 아벨라에서 시작한다. 이 차는 신혼여행 가는 날마저 주유소에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항공사에 다니던 친구에게 SOS를 보내어 출발 시간이 늦은 항공편으로 바꾼 뒤 다행히 한참 만에 시동이 걸려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에도 종종 시동이 걸리지 않았지만 일 년 남짓 타다가 구입한 가격에 그대로 팔았다.
다음 차는 알량한 내 퇴직금으로 산 기아 크레도스였다. 비록 삼백만 원짜리 중고차였지만 중형차라는 사실에 운전할 때도, 오르내릴 때도 뿌듯했다.
이 차를 몰고 큰 아이를 낳으러 갔고 갓 태어난 큰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이 차를 사랑했다. 길을 가다가 크레도스가 보이면 통통하고 짤막한 손가락을 들어서 가리키며 서툰 발음이지만 또박또박 "쿠레도수"라고 말했다. 아이가 만 네 살이 되었을 무렵 남편은 회사 사람이 깨끗하고 예쁜 라비타라는 차를 판다고 했다. 낡은 모습이 역력한 크레도스를 팔고 비슷한 가격에 깨끗한 차를 몬다는 생각에 크레도스를 팔았다.
아이는 크레도스를 보내기 싫다며 종일 울었다.
아이를 달래고 설득하며 산 라비타는 실망스럽게도 승차감이 형편없었다. 당시 상갈리에 살았는데 주위에 도로가 험한 곳이 꽤 많았다. 아이는 카시트에 앉아서 덜했지만 나는 아이 옆에 앉아서 팝콘처럼 튀었다.
결국 라비타를 며칠 만에 팔고 백만 원쯤 보태서 시세보다 무척 저렴하게 나온 EF 소나타를 구입했다. 아이도 이 차를 금방 좋아했고 이 차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다가 갑자기 서서 죽을 뻔한 적이 있고 주행 중 갑자기 시커먼 연기를 내며 멈춘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우리는 차를 바꾸지 못하고 억지로 고쳐서 미국에 오기 전까지 탔다.
우리 가족의 첫 새 차인 시에나는 그저 듬직했다.
두 아이는 시에나 안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에나를 타고 어디든지 가고 이 안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으며 휴대용 DVD 플레이어로 영화를 봤고 코를 골고 곤한 잠을 청했고 치과에서 받은 스티커로 장식했으며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아들은 시에나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다. 차가 고장을 일으켜 바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웃는 얼굴이라고 아들이 좋아하는 차가 나도 좋았다.
이 차에 캠핑 장비를 잔뜩 싣고 요세미티로, 산타바바라로, 줄리앙으로 캠핑을 갔고, 강아지는 이 차에서 수없이 토했다. 남편과 아들은 이 차를 타고 옐로 스톤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들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차에서 발을 올리고 자면서 앞 유리에 발자국을 뿌옇게 찍어놓았다. 뿌연 유리는 차를 팔 때도 닦지 않고 그냥 두었다.
아들의 체취가 남은 마지막 유품이자 우리 가족의 행복한 기억이 진하게 스며들어 있는 마지막 공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차를 팔지 말라고 울며불며 떼쓰는 아들이 없었다. 딸은 무척 쿨하다. 대신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질척댔다. 시에나의 자리에 테슬라가 들어왔다. 남편과 딸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테슬라의 기능에 열광한다. 나는 며칠 더 시에나를 애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