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들이 내 사진을 찍어갔던 이유
한 중국인 관광객이 나를 향해 불쑥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너도나도 몰려들어 내 사진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낯뜨거웠다. 내가 유일하게 알던 단어를 나지막이 뱉었다. "메르씨, 메르씨" 그 날밤 난 파리지엥 유명화가였다. 한 달 전의 나는 전혀 예상 못했었다. 전자기학을 꾸벅꾸벅 졸면서 듣고 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으니까.
한 달 전, 수업 중에 문자를 받았다.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들어가고 싶던 회사였다. 그 순간은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해 모여주는 기분이었다. 판서에 적혀있던 '플레밍의 왼손 법칙'이 저렇게 매혹적인 공식인지 몰랐다. 창밖의 화단에 있던 이름 모를 꽃도 날 향해 피어주고, 살결에 스친 선선한 바람도 날 축복하기 위함이 아닌가?
잠시 날뛰는 기쁨도 잠시, 입사일을 보고 양가적인 감정에 빠졌다. 4학년 2학기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일주일 뒤 입사였다. 나에게는 '한 달 유럽 여행하기'이라는 간절한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여행 갈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다. 더군다나 직장인 되면 은퇴하기 전까지 최소 30년간은 한 달 휴가는 낼 수 없을 터이다. 곧바로 교수님께 찾아갔다. 교수님! 저에게는 오랜 꿈이 있습니다. 교수님께 학문을 배운 것도 너무도 좋았지만, 여행을 통해 세상의 넓이를 느끼고 배우고 싶습니다. 마지막 주 수업과 시험을 빠지고 싶습니다. F학점이 뜨면 졸업 불가로 입사 취소가 되오니 C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중간고사 성적까지도 괜찮았고, 교수님의 배려심과 넓은 아량 덕분에 성공적으로 서희급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덕분에 2주일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합격통지서를 증빙한다면 은행 신용 대출이 가능했다. 곧바로 여행 자금을 마련했고, 가장 가격이 쌌던 Paris In-Out으로 Ticketing 하였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한 권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책은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 중에 인상 깊었던 건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였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고, 관광품을 사는 행위가 아름다움을 보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작가가 추천하는 소유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대상을 면밀하게, 오래 바라보게 되어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더 느끼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천해 보겠다고 어렴풋이 결심을 하고 파리에 도착했다.
도착 후 난 그 어떤 계획도 없었고, 어떤 정보도 없었다. 공항에서 지나가던 한국인에게 여쭤보았다. 숙소가 어디세요? 한인 민박이었다. 나도 갈래요! 그렇게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12시간을 내리 잔 뒤에 샹젤리제라는 거리에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파리는 모든 건물은 예술이었다. 그러다 개선문이 나왔다. 비행기에서 읽었던 '여행의 기술' 책이 생각이 났다. 개선문 앞 길바닥에 앉았다. 무작정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 미술 시간 외에 자의적으로 그리는 행위는 처음이었다. 나중에는 거의 반쯤 누워서 그렸다. 4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러다 한 중국인 관광객이 나를 향해 불쑥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너도나도 몰려들어 내 사진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개선문의 명물 인사, 파리지엥 화가인 줄 알았나 보다. 그리고 내 그림을 보고 간다. 그들은 ‘에이 뭐야? 별거 아니잖아!‘라는 표정으로 웃고 돌아섰다. Sorry, I'm normal person!
아무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지를 그림으로 담아냈던 행위는 책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아름다움을 지긋이 관찰할 수 있었다. 덕분에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선명하게 새길 수 있었다.